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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
200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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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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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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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의 진보나 변화는 있는가?


1.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사람이다(이사야 6장 1-4절)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돈과 쾌락이 백성의 마음을 타락시킨 웃시야의 황금 통치기 말기였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이사야 개인의 배경은?
우리들의 현재의 배경은?

ㄱ. 이사야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사야에게 나타나셨다.
나타나셨다는 것은 찾아오셨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설사 이사야가 하나님을 찾아 간다고 해도, 만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는 말씀은?(롐 29:13)
그 해답은 예레미야 29장 14절에 있다; “내가 너희를 만나리라”

ㄴ. 이사야가 본 것들
- 그는 높이 들린(lifted up) 왕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다
높이 들렸다는 그 의미는?
땅에 닿은 왕좌가 아니라는 것으로 그 의미는?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 그는 성전에 가득한 주님의 옷자락을 보았다.
그 환상으로 그 온 혼은 어떤 상태가 되었을까?
-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두 날개로는 발을, 두 날개로는 나는 스랍들
- 흔들리는 문기둥
- 가득 찬 연기
그때 그의 모습은?

ㄷ. 이사야가 들은 것들(사 6:3)
이사야는 스랍들 중 하나가 다른 스랍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 음성은 무엇을 하였는가?
문기둥들이 흔들리게 하였고 그 집에 연기가 가득하게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음성의 힘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침을 듣고서, 그는 어떠하였을까?
그 어떤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있었을까?
그에겐 어떤 생각도 아이디어도 없었을 것이다
다리가 뻣뻣해지고, 머리가 쭈뼛 서고, 손발이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 스랍의 외침은 무엇들을 나타내는가?
-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신 하나님
- 만군의 주여; 모든 것들의 주님
-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까?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서 우리가 찾을 수 있을까?
온 땅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아닌가?
온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볼 수 있다.


2.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자백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므로”(사 6: 5)

ㄱ. 죄에 대한 깨달음(사 6: 5)
하나님께서 오시면 곧 성령님께서 오시면 자백이전이 깨닫는 것이 자신의 죄들이다.
이사야가 날개들로 가려진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 옷이 가득한 성전, 여섯 날개 가진 스랍들, 한 스랍의
음성으로 인한 흔들리는 문지방, 그리고 연기로 가득 찬 집을 본 후, 한 스랍의 음성 곧 외침을 들은 후
에 나타낸 반응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이사야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의 죄이다:
첫째, 입술이 부정한 것; 자신이 부정하다는 것
둘째,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 가운데 거한다는 것; 그의 교제권이 부정하다는 것
그는 왜 그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을까?
입술의 부정을 죄로 깨달은 그 이유는 이사야 29장 13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러므로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
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고 그들이 사람들의 훈계로 가르침을 받아 나를 두려워하는 도다”
-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상태
-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상태
-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상태
- 하나님의 훈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훈계로 가르침을 받는 상태

ㄴ. 자백(Confession)
회개든 자백이든 그것은 꼭 필요하나, 억지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요구할 것이 아니다.
회개나 자백은 하나님을 만나면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자백한 그 이유는 이사야서 6장 5절 하반절에 나타나 있다
“내 눈이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도다”라고 흠정역 한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나 영어 흠정역 성경에는
“for"라는 전치사가 있다 'for'는 ‘때문에’ 라는 뜻이다.
“for mine eyes have seen the King, the Lord of hosts"
따라서 “내 눈이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기 때문에”라고 번역함이 옳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 자신을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자백이 나왔다.
<비교> 베드로의 자백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눅 5:8)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 1 : 15)


3,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사람임을 늘 깨닫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그 결과로 나타난 또 하나의 현상이다.
자신은 순간적으로 혼의 가장 깊은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화로다, ...... 나는 ......망하게 되었나니” 이사야는 자신에게 화가 임했고, 자신이 망하게 되었음
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하나님으로 인한 평안이 온 것이 아니라, 대신에 두려움이 생겼다 평강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같은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떠한 일이 나타난다고 생각하곤 하였는가?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두려움이 누구에게나 임하게 된다.
우리는 그때 성령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다리게 된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 자신에게 복이 아니요 “화”이며 이제 자신은 망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는 곧 자신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얼굴도 직접보지 못하였는데도 그 같이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들었으니 만일에 직접 볼
수 있어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된다면,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바울의 것과는 어떠한 차가 있는가?(롬 7: 24)
바울은 그 신앙 경험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바울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는 것은?


4.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흠 없는(blameless life)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여기의 흠 없는 생활에서 생활이 하나의 오해를 일으킨다.
생활을 빼고 보면 “흠 없다”는 것이 쉽게 이해된다.
이사야와 같이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계신다
죄인 됨과 가치 없음을 깨달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함께 한다.
“스랍들 중에서 하나가 부집게로 제단에서 불타는 숯을 취해 손에 가지고 내게 날아 와 내 입에 대며 이
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네 불법이 제거되고 네 죄가 깨끗하게 되었느니라”(사 6: 6-7절)
이사야의 불법과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서 이사야의 불법과 죄가 제거되고 깨끗하게 되었음을 한 스랍이 언급하였다.
죄의 사함은 이사야의 부르짖음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쓰시기 전에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쓰시기 전에 죄를 용서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다.
불법의 제거와 죄의 깨끗케 함은 어떠한 상태를 나타내는가?
흠없는 상태
이사야의 부르짖음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은 죄의 사함으로 나타났다.
죄의 용서를 통해 부르시고, 흠 없는 사람이기를 원하신다.
죄의 용서의 수단은?
“제단의 불타는 숯”이었다.
제단의 불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희생제물의 피
이는 상징이다. 제단이라는 것은 대신 죽어지는 희생제물의 제단이요, 불타는 숯은 대신 죽는 짐승을 태우
는 것이다. 이것은 피와 불을 상징한다. 희생제물은 여기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핀 숯과 제단을 보
면 간접적으로 나타나 있다.
죄의 씻음 곧 흠 없는 상태는 희생제물의 피로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불이 대속의 피를 태우기 때문이다 대속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Note: Meyer는 불을 성령
침례를 나타낸다고 언급한다).
죄 사함은 흠 없는 사람의 기본이다.

ㄱ. 흠 없는 생활에 대한 고찰
- 보편적으로 흠 없는 생활이란?
잘못이 없는 생활
- 국어 사전적 정의는?
“모자라거나 잘못되거나 부족한 점이 없는 생활
그래서 우리의 문화 곧 의식이나 사전에서 그렇게 고착되어 있기에 흠 없는 생활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어
려울 것이다.
- 그 같은 생활이 가능한가? 아니다.
따라서 흠 없는 생활(blameless life)이란 잘못이 없는(faultless life) 생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높은 수준의 사람들이 판단할 때, 잘못된 것이 없는(faultless)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ㄴ. 흠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시작하는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
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흠 없게 해 달라는 기도인가?
바울 사도는 여기서 “흠 없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라면 어떻게?
바울 사도는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존(preserved)이란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국어사전은 보존을 “잘 보호하여 간수하여 남김”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이미 있는 흠 없는 상태로 유지해 달라는 것” 이다.
영어로 blameless에서 “blame"은 ”비난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blameless는 ”비난할 것이 없는“이
다. 따라서 “흠 없다”라는 것은 “비난할 것이 없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비난할 것이 우리에게 없다.
누구의 무엇 때문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다.
단지 우리들은 우리에게 비난할 것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음이 우리들의 문제이다. 우리의 상태에
따라 흠 없는 자들이다.
잘못된 것은 언제나 있을 수 있지만, 그 잘못들은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미 용서하신 것들이다 우리의 상태에 따라 흠 없는 자들이다.
내가 잘못하는 많은 일들을 잘못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지만, 우리가 흠없음을.주님께서는 깨닫기
원하신다.
흠이 없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갈라디아서 3:13)

ㄷ. 흠 없는 상태를 따라 살기란 어렵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화평 중에 그분께 발견되기를 힘쓰라(be diligent)"
(벧후 3 : 14)
힘쓴다고 점도 없이 그리고 흠도 없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제시하신 흠 없는 상태이다.
“자신의 영광이 있는 곳 앞에 흠 없이 너희를 제시하는 분”(유 24)
그렇다면 왜 힘쓰라고 말씀하는가?
“흠 없는” 상태에 있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흠 없는” 것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흠이 없어진 것을 깨달아 그것을 묵상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신다.

ㄹ. 흠 없는 상태에 대한 삼면 입장(슥 3; 1-5)
사 단: “제사장 여호수아는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그분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 1)
사탄은 누구를 대적하는가?
사탄은 그의 무엇을 대적하는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그 천사 앞에 서 있더니”
(슥 3: 3)
더러운 옷은 잘못한 것(faults)들을 의미한다.
사탄에게 있어 더러운 옷은?
여호수아의 불법 곧 잘못(faults)
하나님: “내가 네 불법을 네게서 떠나게 하였으니 이제 의복을 바꾸어 입히리라”(슥 3: 4)
- 불법을 떠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여호수아의 불법을 떠나게 하셨다(과거형)
- 그 표로 새 옷을 입히신다.
- 사탄의 대적하는 것을 무엇으로 보시는가?
“이것은 불 속에서 잡아챈 그슬린 나무 조각이 아니냐?”
여호수아: “더러운 옷을 입고 그 천사 앞에 서 있더니”(슥 3: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 많다는 것 곧 많은 죄들을 의미한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아무 말을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은?
여호수아 자신이 아무 말 없이 천사 앞에서 사탄의 대적하는 말을 듣고 서 있는 모습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흠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모습이다.
<교훈>“흠 없는 상태를 깨달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책하지 않는다.
“나도 나를 자책하지 아니하노니”(고린도전서 4장 1-5절)

참조> Meyer는 영이 비어 있는(untenanted) 상태로, 중생 시에 성령께서 그 영안으로 들어간다고 언급한
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이다. 처음 창조될 시엔 그러하였다. 그러나 사단이 죄로 세상 곧 아담의 속에
들어감으로, 모든 인생은 자신의 자녀가 된 것이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엔 마귀가 우리의 영안에 존재한
것이다
이는 자녀란 말 속에서 잘 알 수 있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
이라”(엡 2:2)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엡 2:3)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을 행하려 하느니라”
(요 8:44)


5.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생애에 한 단 한 가지 큰 목적만을 가진다.

나에게 큰 목적이 있는가?
있다면, 구체적인 큰 목적은 무엇인가?
그 큰 목적에 대하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긍정적/ 부정적)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큰 목적이 있다면, 어떻게 하는가?
그 목적을 자신의 목숨과 같이 소중히 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두 마음(double-minded)을 품는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자기의 모든 길에서 안정이 없느니라(unstable)”(약 1: 8)
그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나누어진 사람은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여러 가지의 관심사가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것에도 좀
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나누어지지 아니한 채로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 할 것이며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쏟을 것이다..
이는 생애에 다른 아무 관심도 없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용하심을 받기 위해 너무 많은 일들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이다.
저에게 여러분께서 “너의 큰 목적은 무엇이나?”고 물으신다면,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고 싶습니
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누구보다도 더 알고 싶은 것이 제 큰 목적이다.
그래서 그 점에서 저는 목회를 하는 사역자로선 낙제자라 여겨진다.
나에겐?


6.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오로지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다.

일이 잘 될 때, 문제나 장애물들이 있을 때,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들이다.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는 생활이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용하심을 받지 못하게 하는 장애들을 물을 필요가 없다.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도 아시고 여러
분 자신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잘 되게 해 주신 것이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은혜란 무엇인가?
죄들의 용서의 성격이다.
“우리가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엡 1: 7)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
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 : 10)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사오니 우리가 주의 것에서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 14)


7.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길 안에 있는 사람이다.

“완전한 길 안에서 걷는 자 곧 그가 나를 섬기리이다” (시 101:6)
이 말씀은 누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씀하는가?
완전한 길 안에서 걷는 자
누가 완전한 길 안에서 걷는가?
신실한자(시 101:6)
완전한 길은 누구의 길인가?
완전한 길 안이란?
‘자기 길의 안’이 아니다.
완전한 길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이다
하나님 길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
안에 있기 때문이다.


8.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되”(엡 6: 18)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은 기도에 힘이 있었다
느헤미야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눈을 여시기를 기대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대화를 하는 가운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떠한 기도를 하는 가?
무엇을 기도하는 가?
누구와 기도하는 가?
기도는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기도가 호흡하는 것이고 대화하는 것이라면, 무엇으로 대화하는 것인가?
같은 관심사
같은 관심사란 무엇일까?
그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기도, 간구, 중보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다.
말씀으로 대화하는 가운데 얻는 것은?
지금 나는 어떠한 기도를 하고 있는가?


9.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다.

ㄱ. 말씀을 배우는 자여야 한다
목적: 말씀을 전하기 이전에, 자신의 새 생명을 먹이기 위함이다.
이유: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설명하고 전달하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배우는 사람이다

ㄴ. 누구에게서든지 배우는 사람이다.
미생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녀노소를 불문한 사람들로부터 내가 모르는 것은 배운다. 아
는 것이라 할지라도 잘 들어두고 적는다

ㄷ. 실제적인 것으로 연습하는(practicing) 사람이다.
어떻게?
연습을 위해 말씀을 할 기회를 가능한 한 많이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전도 처이든지, 여유가 된다면 방송설교라는지 어느 것이든 좋다.
그 전과 그 후의 여러분의 말씀을 깨닫는 량이 어떻게 다른 가를 발견할 것이다.
물론 방송설교의 효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설교자를 설교자로서 크게 성장시킬 것이다.
그리고 글을 많이 써 보는 것도 효과적이다. 또한 연습을 위하여, 그것이 주보든지 신문이든지, 가능하다
면 공개적으로 일반인들이 읽는 자료에 글을 게재하고 자주 자신의 글을 읽는다면, 사역자의 자질을 개선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유익은?


10.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다.

분별력에 대한 사전적 정의?
“서로 다른 일이나 사물을 구별하여 가르는 능력”
분별력이란 어떻게 생기는가?
확실한 이해를 통하여
그 이해(Understanding)란 명철 혹은 깨달음으로 불린다
“네가 얻은 모든 것으로 명철(understanding)을 얻을지니라”(잠 4:7)
"말씀을 듣고 깨닫고(understanding) 또한 열매를 맺는 자니”(마 13:23)
다윗은 일에 분별력이 있는 사람으로 사울의 신하에 의해 추천되었다(삼상 16:18)


11.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 대다수에게 있어 큰 문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
우리가 확신해야만 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분께서 또한 그것을 행하시리라”(살전 5:24/히 11: 6; 보상)
다른 하나는, ‘그분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분께서 계시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히 11:6)
그분은 누구를 위하시는 분이신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가?
일하시는(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어떠한 분이신가?
신실한 분이시다(faithful)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고전 1: 9)


12.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능력)으로 일한다.

이 점은 우리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교리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경험적으론?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행 1:8)
여기 권능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가리킨다.
“그러나 너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 20)
여기 기름 부음은 보여주심(깨달음)을 의미한다(요 16: 13-15절)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모든 것을 아는 그 열쇠는?
“그러나 너희가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너희 속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
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
(요일 2: 27)
여기 기름부음은 성령 하나님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 중의 일부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성령 침례라고 말하고 있다 물 침례가 아
닌 성령 침례를 받은 이후에야 구령이나 사역에서 하나님께서 쓰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이 우리에게는 생소하나 그들에게 분명히 성령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역사를 경험한 것만은 사실이
다. 그 말을 가지고 우리가 그들의 그 실상을 왜곡해서는 아니 된다.
혹 그들의 말이 우리의 귀에 거슬린다면, 성령 충만으로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충만이란 의미는?
충만의 경우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따라서 기름 부음이란 그 단어의 뜻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이든 성령 하나님의 권능 곧 능력을 위해서든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
(눅 11:13)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여기서 성령을 주신다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II.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역자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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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나와 교회간의 관계와 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1.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은사 혹은 자신의 사역을 발견한 사역자이다
자신의 은사나 사역을 발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용하신다.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우리는 누구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아래와 같이 하나님께서 다른 직분, 그리고 일을 맡기신다:
로마서 12장 6-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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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언
사역(섬기는 자)
가르침
권면
주는 것
다스리는 것
긍휼을 베푸는 것
고린도 전서 12장 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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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직무가 있다(5절)
다른 활동도 있다(6절)
고린도전서 12: 28-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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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대언자
교사들
기적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타 언어로 말하는 자
통역하는 자
에베소서 4장 11절
--------------
사도
대언자
복음전도자
목사
교사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나, 직분이나 일을 발견하면, 하나님의 쓰심이 된다


2.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열매 맺음의 비밀(창세기 17장)을 깨달은 사역자이다

“내가 너로 하여금 심히 다산하게 하며(exceeding fruitful)" 창 17:6
하나님께서 한 혼에게 말씀하실 때, 그 약속이 실행되는 그 상황과 조건들을 모든 다른 사람들이 주의 깊
게 살핀다. 회심자가 없음으로 해서 전 교회가 마음을 살피는 기회가 크게 많아졌다. 많은 회중이 있는 교
회는 일년 내내 노력한 후, 그 rank가 한 unit 도 증가하지 못하였음을 겨우 고백하였다. 잘 훈련된 사역
자들이 희어진 들판에서 한 단도 가져오지 못하였다 세계의 회심자는 불가피한 이동으로 인한 감소를 채우
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아,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하여금 심히 다산하게 하며 네게서 민족
들을 만들고”라고 수 백 명의 우리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어떠한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의 일을
기대해야만 하겠는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계열의 몇몇 그 자녀들에게 “이제부터는 네 이름을 아
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민족들의 조상 아브라함이라 하리니”라고 말씀(창 17:5)하신다면, 그 사람들에
겐 모든 다른 날들에 일하고 기다려지는 날들이 되지 않겠는가?

ㄱ. 열매맺는데 나이는 상관없다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창 17:1
그는 나이로 보아 노인이었고 늙은 사람이었다. 인간의 생활법칙에 따라서, 그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
가능하였다. “누가 아브라함의 상속인인가?”라고 그의 인근에 사는 그 씨족들에게 묻는다면, 그들은 노
예의 아들 이스마엘이라고 대답하였으리라. 그의 혼인한 아내인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거기에 하나
라도 낳을 가능성이 없었다. 불쌍한 사람이여, 그의 막대한 모든 재산이 이 같은 후사에게 돌아가야 한다
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듯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나서서 “내가 너로
하여금 심히 다산하게 하겠다”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수년 전에, 당신은 당신이 당신의 생활에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수 있다. 그때, 당신에겐 넘치는 에너지, 특수한 재능, 웅변술, 그리
고 개인적인 매력과 매혹력이 있었다. 당신은 그것들로 사람들을 뒤흔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사람들이
당신 주변에 모여들어 그들의 타고난 지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당신의 기대와 비전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당신은 중년기와 노년기를 맞게 된다.
그 시기에 당신은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되는가?
아브라함의 경우를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식을 낳을 희망이나 조건이 구비되지 아니한 아브라함을 찾으셔서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약속을 하셨다.
그렇다면 포기해서는 되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늙었으니 ‘현상유지나 하자“는 생각은?
바로 나의 무능과 무 업적을 생각하는 그 시기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기이다.
교회와 이웃의 죽은 상태가 있다면 바로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쓰실 시기이다.

ㄴ. 열매맺기 위한 열쇠
말씀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엔 동일한 말씀을 거의 24년간이나 계속 들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는 레헤마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
게 이루어지리라”(요 15: 7)
말씀을 들으려 하고 말씀을 깨닫는 것이 열매 맺는 그 전제조건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요 15:5 상반절)
이상의 두 구절에서 공통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사람 곧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이다.
이상의 두 구절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는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나,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는“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다
두 문장의 말씀들 중에서 한 부분의 말이 같으면 다른 부분의 차이가 나는 부분의 뜻은 같은 것이 아닌가?
따라서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은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을 나타낸다

<참조> 로고스(Logos)와 레헤마(rhema)에 대하여(by Pastor Sang kyu, Kang)
누가복음 7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에 등장하는 백부장을 통하여 여러분과 함께 로고스와 레헤마에 대
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 한 백부장이 있었다. 요즈음으
로 말하면, 백부장은 군대의 중대장에 해당된다. 그 백부장에게 사랑하는 종이 있었다. 그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마침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듣게 된다. 그가 예수님께 자신의 친구들인 유대인의 장
로들을 보내게 된다. 그들을 통해 예수님께 “자기 종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하게 된다. 참으로 놀랍다.
자기 종을 위하여 간청하는 사람이 백부장이란 직책을 가진 로마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말을 전한다. 그들이 백부장에 대하여 말한 것들은, 그가 유대인들을 사랑하였고 유
대인들의 회당까지 건축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부장뿐만 아니라, 보냄을 받은 유대인의 장로들조
차 절박하게 간청을 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그를(백부장) 위해 이 일(그 종을 낫게 해 주는 것)을 하시
는 것이 그에게 합당하니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 백부장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그 백부장이 그의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주여, 친히 수고하지 마옵소
서.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들어오심을 감당할 자격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주께 나아갈 자격
도 없는 줄로 생각하였사온즉 오직 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눅 7:6-7)라고 말하
게 한다. 이 백부장의 말을 살펴보면, 자기 자신에게로 예수님을 들어오시게 할 자격이 없고, 또한 자신
도 예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말한 데서 자신의 자격 없는 죄인 됨을 잘 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리고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면서, “한 말씀만 하면, 그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깊게 보고자 하는 것은 백부장이 예수님께 “오직 한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한 말이
다. 백부장은 한 마디의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였다. 백부장에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었다. 그런
데 사람들은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하지 않는 곧 만족하지 못하
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경 속의 바리새인과 같이 의문(글자/letter; 롬 2장 29절) 안에 갇혀있음을 나타낸다. 그 결과, 사람들
이 성경글자에 속하여, 그 성경 글자가 머리 속에 맴돌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던 당시
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한 사람이었는데도, 백부
장은 예수님께 한 마디의 말씀만을 청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백부장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레헤마의 말씀을 가져) 예수님의 인정하
심과 같이 위로부터 온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백부장의 한 말을 직역으로 번역하면 “한 말
씀으로 말하소서 (say in a word)” 이다. “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이다. 로고스라는 헬라어는 말씀
을 의미한다. 이 “로고스”가 나타내는 말씀의 성질은 과거분사적 의미로서 “말한 것(said)”이다. 로고
스는 이미 언급된 것을 의미한다. 혹은 이미 기록된 성경말씀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말은 ‘말
씀을 말하다(epo)’로서, ‘이미 기록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곧 로고스의 말씀을 또 말 하십시오’라
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헬라어로 레헤마의 동사형이다. 레헤마도 헬라어로 말씀이다. 그러나 그
뜻은 헬라어로 현재분사적 의미로서 “말하는 것(saying)” 이다. 레헤마는 말씀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말하고 있다’는 진행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기록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계
속 말하여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그것으로 그만이다. 하
나님의 기록되고 선포된 말씀이 로고스로만 끝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거나 무시하곤 한다 헬라어로 로고스란 단어가 사용될 때 마다 ‘말하다’
라는 레헤마 동사가 함께 사용된다. 로고스란 말씀이 레헤마로 말씀되고 있는 상황이다. 백부장의 말에 로
고스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레헤마의 상태이다. 이에 이미 기록되고 선포된 하나
님의 말씀이 계속 말하여지는 놀라운 생활이 필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내 말들(레헤마)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
게 이루어지리라.” 말하고 있는 진행상태의 말씀을 가리킨다.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구함
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그 전제조건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의 말씀)을 외우고 적용하는 차원이 아
니라, 레헤마의 말씀 곧 깨달은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간구가 응답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레헤마의 말씀이 있어야만 한다. 요한복음에는 다시 한번 더 “말하다(레헤마 동사)”라는 단
어가 필요 없다. 왜냐하면 “레헤마”라는 명사의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15장 7절은 “레헤마의 말
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한다. “거한다”는 영어로 abide이다. “거주한다”는 뜻이다. 거주
한다는 것은 계속 있다는 의미이다. 레헤마의 말씀이 계속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레헤마의 말씀
이 계속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말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성령님
에 의하여 확실히 깨달은 그 말씀이 살아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깨닫지 않고서는 어
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계속 있고 계속 말하는 상태겠는가? 한번 확실히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늘 생각나고 묵상된다.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
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두 가지 부분
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한 부분은 무엇인가? 빵을 필요로 하는 몸이다. 다른 한 부분은 무엇인가? 하
나님의 말씀이 양식으로 꼭 필요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몸에 필요치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에게 필요하다. 여기 언급되는 “말씀”은 헬라어로 레헤마로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그리고 아무런 의미나 감동이 없는 말씀아 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커다란 깨달음의 기쁨을 주는 말씀은 우리들에게 있어 계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살아있다. 그 레헤마의 말씀을 듣거나 묵상할 때마다 새로워지며 힘을 얻는다. 신명기 6장 6절의 “마음”
이란 히브리어로 레밥(lebab)이다. 마음이란 히브리어 원어는 “깨달음”이란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고”란 “이 말씀들을 깨달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은 ‘말씀(로고스)을 듣고 깨달아’라고 말씀한다. 여기 “깨달아”는 레헤마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
음속에 있거나 깨달음이 있는 말씀이 바로 레헤마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은 깨달음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
다. 시편 49장 20절은 “존귀함 중에 거하는 사람이라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라고 언급한다. 사람은 존귀한 존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창조물
이기 때문이다. 다른 그 어떤 창조물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존귀한 사람이라도 하나
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고 말씀한다. 그것도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신
다. 멸망하는 짐승에겐 깨달음이 없다. 이는 말씀의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는 것을 나타낸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고, 교회직분들을 두루 거치고, 하나님을 부지런히 섬기며, 그
리고 여러 가지 신비로운 경험들을 하였다 해도 ‘말씀의 깨달음(레헤마의 말씀)이 없으면, 짐승과 같다’
는 말씀이다. 로고스의 말씀이 레헤마의 말씀이 되었을 때,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쓰임이 될 것이다. 또한
교회가 점점 더 젊어지고 새로워 질 것이다.

c. 열매 맺는 데 있어서의 전제조건
개인적인 말씀의 경험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나(하나님)와 너(창 17:7)
하나님의 언약은 은혜에 속한다.
we just fall on our face, and let God talk right on
하나님의 언약은 개별적이고(individual) 개인적(personal)이다
이 의미는? 대중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 약속에 누구든 포함됨은 분명하지만, 개별적인 경험이 있어야만 한다.
개별적이 되는 그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에게 보여지는(확신되는) 과정이다
“이는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고 권능과 성령님과 큰 확신으로 이르렀기 때문이니”
(살전 1: 5)
하나님께서 다가와 말씀하시는 위대한 순간이 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홀로 가서 하나님께 기회를 드려라!
그 말씀이 보좌로부터 직접 비추어진 광선과 같이 비추어지기 까지 그 말씀 조항을 읊고 묵상하라
언약의 비준(ratification)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있다
to your wistful(탐내는) 혼(soul)에게,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이다.
확신의 힘과 그 결과는?

d. 열매 맺는 사람의 표
할례(circumcision)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기 전에 칼로 말미암은 육체의 고통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모든 습관, 좋아하는 애정, 악한 욕심들을 버린 것은 아니
다.
그에게 있어 할례의 의미는?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림으로”(골 2: 11)
이것 역시 피할 수 없다.
날카로운 칼의 사용이 선행되지 아니한 영적 열매란 없다. 날카로운 칼의 목적은?
아브라함이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기 전에 고통이 있어야만 하였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모든 습관, 좋아하는 애정, 악한 욕심들을 버린 것은 아니
다. 그는 때마다 자신의 할례 받은 것을 생각하며 자신이 육체에 살고 있으나 육체에 속한 자가 아님을 알
게끔 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우리에게 있어 할례가 이루어진 곳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 5: 24)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할례된 것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 목적은?
여러 저자들 역시 십자가의 환경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십자가의 환경이란 십자가로 둘러쳐져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훌륭한 종들도 일찍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자신이 둘려 쳐져 있었다 고 말했다.


3.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사역자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 15-24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섬기기 전에 물으신 말씀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표면적으론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가”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적으론 “베드로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아가파오-두번/ 필레오-한번)”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려 하면 어떠한 상황이나 어떠한 원수를 만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확
인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사랑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
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가를 알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두 번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번은 친구간의 사랑인 필레오로 물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늘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신명기 6장 5절에서도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
씀하신다.
그리고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예수님께서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
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은즉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라“고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
다.
예수님께서 여기서도 아가파오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할 것을 말씀하신다.
“다하라”는 의미는?
사람마다, 그 혼(soul)의 한 가지 기능에 강하다는 것을 간주할 때, 강하다는 것은 생활에서 주로 나타나
는 기능을 의미한다. 신명기 6장 5절의 마음(감성), 혼(의지), 힘(생각/ 지성)을 “다하여” 곧 “모든”
이란 다른 혼의 기능들도 함께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때 전인적인 하나님의 원
하시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한 가지 기능에만 치우치기 때문이다.
혼의 한 가지 기능에 모든 것을(전력을) 다하곤 한다.
이 말씀은 혼의 모든 기능을 다 골고루 나타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명기에서 요구하는 그 같은 혼의 세 기능을 다하는 사람이 될까?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만큼 다하게 된다.

그러나 오스왈드 J. 스미스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하여도 말한다.
“To be true to the great fundamentals of the faith does not prove that you
are in heart to Jesus"
그들의 머리로는 올바른 무리들은 그 마음에선 그릇되어 있다.
그러나 오스왈드는 “머리로는 옳고 마음으로는 그릇되기보다 나는 차라리 머리로는 그릇되고 마음으로는
올바르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The lamentable fact of fundamentalism is its hardness and betterness of spirit" 그는 계속하여 말
한다.
“그들의 생각은 믿음을 위한 순교자가 돨 수 있게 할 수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낫을 주셨지만, 우리 형제들에게 사용하도록 주신 것은 아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charity/ agapaw)이 없으면 그것이 내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느니
라“ (고전 13: 3절 하반절)
하나님을 섬김을 “의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여야 한다”
하나님을 “섬김은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사랑을 요구한다.”



4.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말씀 사역자이다

행 6:4,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와 말씀사역에 전념하리라”
말씀 사역의 진보는?
이 말은 여러분이 전한 설교나 교육 내용 중에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달라지고 있는 가를 묻는 말이다.
그때, 동일한 성경구절에 대한 당신의 설교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 사람의 깨달음의 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설교 내용상 20년 전이나 20년 후나 똑같은 설교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데,
과연 그럴까?
어제 설교를 원하는 곳이 있다고 해도 내일은 그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
설교자에게 먼저 그 말씀이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말씀사역의 방식은?
.그 대표적인 말씀사역의 방식은 바울 사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행 17: 2-3)
a. 성경인용
b. 토론
c. 설명
d. 주장
e. 선포
그렇게 되려면 먼저 자신이 그 말씀에 대해 확실해야만 한다.
그 후에 스스로의 검증이 성경을 통하여 있어야 한다.
비로소 이상에서 언급한 방식이 가능하다.
말씀사역은 각기 다르다
그러나 실제론 사역자들마다 유사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식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자신만의 특별한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많은 말씀이 아니라 그리고 모든 말씀이 아니라, 최소한 한 말씀엔 성
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깨달음으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대답할 수 있는 전문가 이상의 곧 그
어떠한 유명한 대학의 저명한 신학 박사이상의 학자와 토론해 이길 수 있는 그 이상의 자신만의 말씀이 있
어야만 한다.
스톡홀름 대학교의 앤더슨 에릭슨은 “어떤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과 성공과 성취에 도달하려면, 최소 10
년 정도는 집중적인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교육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는 7명의 여러 분야의 걸출한 업적을 남긴 창조적 거장들을 연구한 결과 그
같은 결론을 내렸다.


5.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내 일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는 사역자이다.

그 이유는?
농부는 농사일을 해야 한다, 그는 농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은행가가 아니기 때문에 은행 일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기 원하시고 맡기신 일이 있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이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에 몰입할 필요가 없다.
그 일을 그냥 아는 자라고 아니하고 확실히 아는 자라고 한 그 이유는?
마땅히 행할 바를 깨달은 자(대상 32: 32)여야 하기 때문에,
내 일은 무엇인가?


6.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섬기는 사역자이다.

섬김은 가장 큰 성공의 동기이다.
메시지는 다른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메신저를 통해서만이 전해져야 하기 때문에 메신저
의 섬김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섬기는 일들이 없었다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성공의 동기는 돈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말에 대한 의문점은?
그러나 섬김이 더 우선적인 그 이유는?
예수님은?


7,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풀어주는 사역자이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그 악령으로부터 풀어주는 일을 하셨다.
막5:1-21, 마8:28-34, 눅8:26-40, 마9:32
예수님께서는 눈 먼자, 벙어리, 귀머거리, 중풍병자들을 그 병에서 자유케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묶여있던 노새를 풀어 그 노새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풀어주는 사역을 하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우리의 사역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그들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능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전하는 것이다
(행 26:18)
a. 그것은 자유의 사역이다
b. 그것은 새로운 능력을 의식하게 되는 생활이다
c. 그것은 평안과 안식의 사역이다.


8.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사람을 아는 사역자이다.

사역자는 자기가 관계하고 있거나 관계할 사람을 알아야만 한다.
사람을 모르고 어떻게 사역을 하겠는가?
사람은 어떠한가?
사람은 무엇인가?


9.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살아있는(living), 그리고 활기 있는(vital)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다.






III.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과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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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분리된(seperated from) 사람이다.

부정적인 측면의 분리란 “부정한 것에서 나오는 것 곧 떠나는 것”이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너희는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너희는
그 땅의 한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주의 기구들을 나르는 자들아, 너희는 정결할지니라(be clean).”
(사 52:11)
이 말씀은 두 가지를 요구하고 있다;
하나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부정한 곳에서 나오라 곧 떠나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요구 중에서 더 나은 그리고 더 가능한 요구는 무엇인가?
예, “부정한 곳에서 나오라 곧 떠나라”는 것이다.
부정한 곳에서 나오면 더 이상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정한 곳에서 떠나거나 나오는 일은 쉬운 일인가?
오랜 습관을 끊기가 어렵듯, 오랫동안 익숙한 곳에서 떠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부정한 곳에서 떠나게 하는 그 힘은 어디에 있는가?
더 나은 곳이나 더 나은 상태를 발견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 상태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정결해진 우리의 상태이다.
분리된 생활은 다음의 것들로부터의 분리된 생활이다:
- 악한 습관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 과도한 식욕에서 분리되어야만 한다
- 세상의 연합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한다
세상의 사업 파트너 싶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비밀결사 단체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구원받지 않은 자와 연합해서는 아니 된다
결혼을 위한 세상조건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한다(고전 7:39)
- 세상의 목표나 야망에서 분리되어야만 한다
- 세상 친구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한다
- 세상 쾌락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히 11:24-26/ 모세)
- 현세적인 생각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한다
현세적인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 더욱 더 그 농도가 짙다.
지금 잘 살면 되고 지금 내가 무슨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잘 되면 된다는 생각
우리가 현세적인 것에 대해 자가 진단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매일 하늘나라에 대하여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 정도를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현세적인 생각에 젖어
사는 가를 확인할 수 있다.
- 체념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이는 일이 안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일이 안될 때,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체념하게 된다. 그래서 안 되는
것으로부터 쉽게 도피하곤 한다.
이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 어떠한 죄들보다 이것이 더 큰 죄악이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보상하시는(히브리서 11장 6절) 하나님이시기에 체
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 기존의 것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기존의 것들이란 6000여 년 간의 인간의 역사에서, 사단이 인간의 혼과 몸에 심어둔 것들이다. 예를 들
면, 진화론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에 대하여 창조론이라고 말한다.
창조과학회의 회원들조차 하나님의 창조를 창조론이라는 부른다.
“론(論)”이란 이론(theory)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이론이 아니기에 창조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도 교회론, 성령 론,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와 성령 하나님 그리고 창조 등을 진리로 깊이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
들이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말을 그렇게 할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렇게 그것들을 부르고 있는 한, 생활에서 우리가 깨닫고 믿은 것들을 누릴 수 없다.
- 표적이나 나타남(manifestation)을 항상 추구하는 종교생활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 우리의 타락한 성격의 활동들에서 분리되어야만 한다.


2.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구별된 사람이다.

하나님께 로의 구별은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분리로서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 자체”에 있다.
고후 6:14-18, 요 15:19, 요일 2:15, 약 4:4
우리를 부르신 그분은 어떠한 분이신가?

첫째,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이미 나는 누구에게로 구별되어 있는 자인가?
내가 아는 그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께로 구별되어 있는 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단지 믿는 다고 말할 뿐이지, 하나님의 창조를 확
실히 알아서 하나님은 창조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한번 해 보라!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온 땅에 가득한데(사 6:5) 어찌 오늘날과 같이 살겠는가?,
다른 교회는 그만 두어두고라도 저를 포함한 성서적인 침례교회 교인들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창조를 인식하고 매일 살고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가?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우리 사역자들이 매일 인식하고 우리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알고서 생
활한다면 그 생활이 지금과 얼마나 더 달라지겠는가?

둘째, 나를 구속하신 분이시다
나를 구속하셨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나를 구속하셨다는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나님께로 이미 그리고 충분히 구별되어 있다
“그리고 평강의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wholly)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And the very God of peace sanctify you wholly”
"sanctify(거룩히 구별한다)"라는 단어도 미래형이 아니라 원형 혹은 현재형이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
었노라”(히 10:10)
이것을 성경에서는 sanctified라고 언급한다 곧 거룩히 구별하였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과거분사형으로 수동태의 형식이다.
수동태형 구별이란 곧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성결이란 그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분에 의해 되어
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다른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거룩히 구별하였다는 말의 의미는 set apart 이다
이 의미로 볼 때, ‘거룩히’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이는 만일에 하나님께서 구별되었다는 의미라면 별 무리는 없지만, 이 “거룩히”라는 말로 인하여 사람들
에게 하나님께 사용함을 받으려 하면 높은 수준의 도덕적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참조>“그리고 평강의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wholly)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한글
흠정역성경에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흠정역성경엔 “And the very God of peace sanctify you wholly”
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원하노라”라는 단어가 없을 뿐 아니라 "sanctify(거룩히 구별한다)"라는 단
어도 미래형이 아니라 원형 혹은 현재형이다(살전 5장 23절)


<참고>
오스왈드는 sanctify(setting apart)에 대하여 서로 일치되지 않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보인다: 여기서
“성화”나 “거룩히 구별하였다”라는 말을 사용치 않는 것은 “따로 정해진/두어진(set apart)”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저는 영어(sanctify)와 그 의미(set apart)만을 사용하고 있다- 강상규
- sanctify(setting apart)가 아닌 것
a. 시험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b.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c. 죄로부터의 점진적인 해방(구원)이 아니다.
- sanctify(setting apart)인 것
a. 순간적인 전환기적 경험이다.
b. 죄에 대한 승리의 생활이다.
c.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여기엔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다.
그는 회심 시에 하나님께 로의 구별 곧 분리가 있다고 말하지만 회심시의 것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고, 죄
로부터 순간적인 자유를 말하면서 죄에 대한 승리를 하여야 set apart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께 로의 구별의 시점은 회심 시며 “거룩히 구별된 것”을 깨달을 때이다.
그저 “구별하였다”로 보면 된다. 누구를 위한 구별인가? 하나님께 로의 구별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께 로의 구별은 극소수의 사람에 국한된다.
그래서 두 번째의 큰 전환기적 경험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practical) 것이다.
이는 신학적인 입장으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나를 하나님의 생명(새 생명)으로 낳으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났다(벧전 1장 3하반절)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낳으사”
내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 것은 완벽하게 하나님께로 구별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5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별된 생활을 하는가?
즉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함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하
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남으로 구별되어졌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데 있다. 이는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이 없
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거룩히) 구별하라/sanctify yourselves”(수 3:5)는 것은 무엇인가?
여호수아가 한 말은 분명 사람들이 구별해야 될 것이 있는 것으로 들려진다.
여호수아야 (거룩히) 구별하라고 말하는 것은 레위기서에서 말하는 그 같은 것들이다.
“자기 옷을 빨고 또 물로 목욕할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뒤에 정결하려니와”
(레 17:16)
이 말씀은 사람들로 구별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본문에서는 정결하게 되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그렇
지 않으면 하나님의 정결을 이해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일들을 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하나의 교육재료이다.


3.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해방된 사람이다.

죄가 너희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로마서 3:장 14절의 말씀에서 죄는 우리를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그 죄들과 또한 많은 죄들을 짓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
은 사단이 우리에게 이미 심어 놓은 것들이 활동할 뿐이다. 바울은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을 발견하였지
만 로마서 7:장 24절에서 자신이 죄에 가두어진 것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그 후 로마서 8장 1절부터 2절까지에서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을 언급하고 있다.
죄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내적 죄들(inward sins)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 죄들(outward sins)이다.
여기서 우리는 외적 죄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외적 죄들은 곧 몸으로 짓는 살인, 간음, 도적질과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고 근본주의 사역자이기에, 그러한 것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 내적인 죄들이다.
그 내적인 죄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
자가에서 피로 사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a. 죄책감으로부터
“나도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하노니”(고전 4:3)
b.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염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빌 4:6)
“염려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씀하신다. 마 6: 25-34
b. 낙담(discouragement)과 실망(despondency)으로부터
낙담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낙담과 실망은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할 때,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였고, 자신은 그 조상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며, 혼자 남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왕상 19:1-14)
c. 초조와 불만으로부터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라”(빌 4: 11)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 어떤 처지(형편)에서도 만족하기를 배웠다고 한다.
- 무엇을? 만족하였다.
- 언제? 어떠한 형편이나 처지에서도
- 어떻게? 배워서
d. 원망과 불평으로부터
d. 분노와 악의(malice)로부터
“화를 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e. 시기와 교만으로부터
f. 욕심으로부터
g. 저주로부터
- 성장과정이나 여러분의 성인 생활에서나 그리고 사역하는 과정에서나 여러분이 다른 여러분의 부모나 선
생, 그리고 친구들을 포함한 사람들에게서 들은 저주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습관적으로 그러한 저주를 하
였던 적이 있을 때, 그 저주가 여러분에게 박혀 오랫동안 내재해 있을 수 있다 그 저주로부터 우리는 이
미 해방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이는 기록된 바, 나무
에 달리는 자마다 다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음이라”
(갈 3: 13)
h.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이 부분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해서 과거의 그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사역자인 우리들도 과거의 것들로 고통을 받을 때도 있다.
i. 기존의 생각으로부터
자신의 오래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을 확인해 보라!
일상생활에서 반복되는 말들을 살펴보면, 그 말들이 자신의 오랜 생각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
면 그 생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j. 따지는 것으로부터
- 선과 악, 옳고 그름, 그리고 경우를 따지고 있다면, 아직도 그러한 것에서 해방된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생명에 속한 것이다.
에덴동산으로 가서 살펴보자.
에덴동산 중앙에는 유일한 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심겨있었다(창 2:9)
한 나무는 생명나무요
다른 한 나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생명나무와 산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각각 누구를 나타내는가?
그런데 사단이 뱀을 통하여 사람으로 선택하게 한 나무는 다름 아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단에게 속한 나무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 자는 생명으로 사는 자이다.
생명에 속한 자는 다른 사람이나 사건을 따지는 자가 아니다.
생명나무에 속한 자의 마땅한 생활은?
ㄴ. 해방되는 방법은?
- 해방되는 것은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깨달음으로 단번에 해결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것
들은 그 생명의 성장이 없이는 생활에서 나타나지 않기에 성장이 절대 필요한 요소이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 생활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깨달아 믿는 순간에 사람이 달라진 것들을 느낄 수 있다 그
것은 큰 확신과 능력으로 구원받았기에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다. 어떤 사람은 그 현상이 며칠동안, 몇
달 동안 지속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혼과 몸의 것들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그 사람의 혼과 몸의 것들이 그대로 있음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후에,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care 되어야 한다.
그 간은 분리, 구별 그리고 해방된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로마서 바울의 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로마서 7장에선 “나(I)", 나에게(나를 me) 그리고 나의(my)라는 단어가 40회나 사용되었고, 로마서 8장에
선, 성령 하나님이 19회나 사용되었다
‘나 중심의 삶’에서 ‘성령 중심의 삶’으로의 이동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성장하기까지는 베드로전서 2장 1절과 같이 모든 해방되어야 하는 것들을 생명이 성장할 때 까지 따로 두
어야만 한다(laying aside)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교활함과 위선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금 없는가? 있다.
그런데도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두 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하나는 “모든 악의와 모든 교활함과 모든 비방하는 말을 과연 버렸느냐”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할 수 있는가?
말씀 그대로 보자면, 말씀을 사모할 수 없다.
말씀의 성장을 원하는 사람의 그 부분은 어디인가?
영 곧 하나님의 생명이다.
따라서 성장을 하는 과정을 거쳐서 그 모든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점진적으로 없어진다는 내면적
인 뜻이 담겨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12장 1절도 베드로전서 2장 1절과 유사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
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laying aside)”
이 말씀에서도 모든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우리가 떨쳐 버리지 못하면 인내로서 경주를 못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궁극적인목표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들을 다 떨쳐버리거나 버리지 못하였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사모할
수 있고 사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다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 해도 우리는 지금 경
주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욕구로 해서 성장이 있고 그 다음에 다른 변화들은 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해
방을 누리는 정도는 성장에 비례한다.


4.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a. 드림
- 자아(혼/감성(마음), 의지(혼), 지성(mind/생각))
- 몸
- 시간
“시간을 되찾으라 날들이 악하니라/ redeeming the time"
“되찾으라”의 의미는?
그 단어는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단어는 우리를 위해 값 주고 대속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잃어버렸거나 잘못 사용하는 시간을 위해 우리가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 재능
- 물질
1/10이 아니라, 전부이다.
모두가 주님의 것이다.
- 사랑하는 사람
b. 승리




IV.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과 관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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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입증된 사람이다.

주께서 그와 함께 있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입증된 자(삼상 16:18)- 다윗
“주께서 그와 함께 계시나이다”
이 말씀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입증된 자란 의미의 말씀이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입증되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 그 가족에게 입증된 자여야만 다
자기 자신은 아무도 속일 수 없다
그리고 그 가족 역시 속일 수 없다 항상 함께 살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better) 여기는(esteem) 사람이다 (빌 2:3)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다른 사람에게 나보다 나은 부분이나 인품 그리고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인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내야 한다.
그것을 찾은 사람은 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긴다
자기보다 낫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자기보다 낫게 여기겠는가?
자기보다 나으니까 낫게 여기는 것이다.
목사라고 해서 그것을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
그 수단은 마음의 낮음(in lowliness of mind)이다.
마음이 낮아져 있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에게 있는 더 나은 것이 보이지 않게 되고 어느 한 가지로 해서
경시하게 된다.


3.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주관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내 생각과 내가 깨달은 말씀과는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나”가 없는 사람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감정이나 내 의지나 내 지성이 없다는 말이다.
오로지 관계하는 사람(Related man)과 말씀만(the Word only)이 있을 뿐이다.


4.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말에 제한을 받는 사람이다.

“사람의 배는 그의 입의 열매로 만족되며 그는 자기 입술의 소산으로 충족되리라.
사망과 생명이 혀의 권능 안에 있나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것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언 18장 20-21절
아이들은 매일 말을 먹고 자란다.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이 말을 듣고서 영향을 받는다.
미국 교도소의 재소자 90%가 부모로부터 “너 같은 녀석은 결국 교도소에 갈 거야”라는 그 성장기에 들었
다 한다.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본의 연구가인 에마토 마사루의 실험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똑 같은 밥을 두 병에 넣고, 하나에는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붙여 두고, 다른 병에는‘망할 자식’이라
는 글을 붙여두어다. 그 후에 날마다 두 초등학생에게 그 말들을 그대로 읽게 하였다. 그 한 달 후에,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써 둔 병의 밥은 발효되어 향기로운 냄새가 났으나 ‘망할 자식’이라고 써 둔
병의 밥은 형편없이 부패해 검은 색으로 변하여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한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대접하면 결국 그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지만, 잠재력대로 대접하면 그보다 큰 사람
이 된다.” 괴태
실례>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 소아신경외과 과장 벤 카슨은 세계 최초로 세쌍둥이 분리 수술에 성공한 의
사다. 그는 흑인 빈민가 열등생 출신에서 세계 최고의 의사가 되었다. 기자가 그에게 “오늘의 당신을 만
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 ‘밴 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었습니다“라고 기자에게 대답하였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말들을 하고 일 살아간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그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고 적다.
반면에 일상적인 말을 우리가 관계하는 사람들과 아주 많이 한다.
탈무드에, 어떤 왕이 광대 2명에게, 한명에게는 “가장 악한 것”을, 다른 한 명에게는 “가장 선한 것”
을 찾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두 광대가 그 답을 찾아왔는데, 그들의 답이 모두 같
았다 그 답은 “혀”였다.
그것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고 있지 않는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말을 하고 있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경우를 들으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한 문제는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 말하는가?(시 39:1)
“내 혀로 죄를 짓지 아니하리니 사악한 자가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재갈을 물려 내 입을 지키리라”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 말은 사악한 자 앞에서도 말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악한 자 앞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대적하는 말을 하든지, 아니면 득이나 변명을 하고자 한
다.
그러나 다윗은 아예 말하지 않는다고 언급하는데, 그 이유는?


5.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일들을 돌아보는 사람이다(빌 2:4)

“자기 일들만 돌아보지 말고 남의 일들도 돌아보라”
자기 일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남의 일들은?
그것은 이타주의(altruism/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주의)의 생활이다
이타주의란 사전적으론 “사랑과 희생으로 타인의 행복을 위하는 생활” 이다.
이타주의가 포기한다는 기존의 관념이 있지만, 그것은 취하는(taking in) 생활이다
물론 그 단어는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하여 얻는 생활이기도 하다.
(마 7: 12)
사역자로서 자기 일과 다른 사람들의 일이 대립될 때, 무엇이 더 우선적이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6.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단정한 사람이다(comely person)(삼상 16: 18)

단정한 자란?
우리가 알고 있는 단정과는 다르다.
우리는 차림새가 잘 짜여져 있는 모습을 단정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 의미는?
‘알맞은 자’ 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알맞다는 말씀인가?
하나님의 쓰심에 알맞다는 의미이다


7.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lowness of heart)을 가진 사람이다.

(행 20:19, 벧전 5:5-6, 약 4: 5-6, )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디모데전서 1장 15절)
겸손한 마음이란?
그 누구보다도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마음이다


8.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다.

고난을 받는 것은 누구 때문에?
마태복음 5장 11절 “나로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며 너희를 대적하여 거짓으로 온갖 악한 말
을 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고난 받는 그 이유는?(히 11: 39)
“이 사람들은 좋은 평판( having obtained a good report)을 얻었으되”
좋은 평판이란?


9.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많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행 20: 19)

“내가 온전히 겸손한 마음과 많은 눈물과 또 숨어서 기다리는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내게 닥친 시험과 함
께 주를 섬기며”
왜 많은 눈물을 흘리는가?
많은 눈물에서 느껴지는 것은?


10.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오래 참는 인내의 사람이다(고전 13:4)

바울 역시 오래 기다린 사람이다.
오래 참아야 하는 그 이유는?
사람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거나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 참는 그 비결은?
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charity/ 아가파오)


11.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금전에 대한 태도가 분명한 사람이다.

“돈을 사랑치 말라”(히 13:5)
돈을 사랑한다는 이중적인(two-fold) 의미는?
- 가진 자?
- 가지지 못한자?
실제적인 금전에 대한 태도들은?


12.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이다.

한국의 문화는 부정적인 생각에 젖어있는 것들이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눅 1: 37)
“만일 네가 믿을 수 있거든,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막 9:23)
아프리카에 가서 신발을 판매하려는 한 신발업체가 있었다면, 러분은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겠는가?
그 회사에서 두 사람을 파견하였는데, 그 두 사람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은 “신발 수출 불가능, 가능성 0%, 전원 맨발임” 으로 보고하였다
다른 한 사람은 “황금시장, 가능성 100%, 전원 맨발임” 으로 보고하였다
이렇듯 동일한 상황에 대하여 기존의 태도와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우리는 어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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