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번글
행복한 가정(1)-강상규목사저
2003-05-14
2912건 조회
- 머릿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하면 그 성경 자체가 하나님이나 기독교에 대해서만 말씀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한 가정에서의 생활을 다루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변화된 한 사람이 변화된 가정과 사회를 어떻게

살아왔는 가를 자세히 언급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변화받은 사람과 그 가정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기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로 행복한 가정생활과 선과 악을 관련지어 적어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다른 사람으로 부터 배우고 듣고, 그리고 직접 가르치거나

자녀를 교훈한 것이 있다면 이는 곧 선과 악에 대한 것일 것입니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 혹은 '악하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 살아온 우리들로써는 예외없이 선악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고 어떻게 해서든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 왔습니다. 설사 범법자라 할찌라도 선하게 살아

보려는 양심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서고금 그리고 지구상 곳곳마다 고유한

선과 악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곳곳마다 선과 악의 종류가 다르며 그 기준도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습니

다. 이 곳에선 선이 되는 것이 다른 곳에선 악이 되며, 다른 한 곳에선 악이 되는 것이 또 다른 한 곳에

선 선이 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선과 악"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또한 선과 악을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은 그 기준이 모호하다는데 있습니다. 수많은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종교

단체가 권선징악을 가르치며 실천에 옮기려하나, 그 기준이 너무 다르고 그 성격도 판이하여 문제에 문제

를 더욱 가중시켜 왔습니다. 예컨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전제를 두고 효도를 강조하게 될 때, 자녀들이

알고 있는 선악의 잣대로는 부모를 공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도 자녀들이 볼 때, 그 행위

가 완전하다거나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육학자들은 "부모가 본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모가 완벽하게 자녀들에게 그 "본(example)"을 보일 수 있

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각양각색의 선과 악이 있고 그 기준이 다른데, 어찌 자녀들에

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행위에 따른 선악에 대한 이론이나, 혹은 자기 생각

이나 습관에 따라 자기나 그 단체에게 좋아보이는 것이 과연 진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진리란 최소한

처ㅣ서한 항상 변치 않아야 하며, 그 기준도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이

불명확하고 불확실한 선과 악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고,미혹을 받아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불분명한 선과 악으로써가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해 이 선악의 문제를 해결하며

오랫동안 사람들이 추구해 온 도덕이나 윤리를 완성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일견 보아, 셩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종교인이 되도록 권유하는 듯 하나, 실제로 이 선악에 접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며, 이러한 성경에 접근함으로서, 우리들 가정에 행복한 부부생활,

참된 부모 공경과 자녀 사랑이 활짝 꽃피워 건전한 혈연사회와 지역사회를 만들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비록 기독교의 셩경 이야기같이 언급되는 것 같지만, 끝까지 읽어 보십시오. 오늘날과 같은 세대에 꼭

필요한, 그리고 실제적인 진리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행위에 의한 선악에서 해방되어 더 높은 하나님의 참 자유를 마음껏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평강과 축복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끝으로, 이 책을 만드는데 재정 일부를 도와 주신 하 재관형제님과 격려해준 성복이와 성용이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줄 확신합니다.



1997년 9월 29일

강 상 규 씀



Ⅰ. 아담과 하와 / 최초의 부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광활한 우주와 아름다운 대자연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것이다.

이는 인간을 창조하실 계획을 세우시기 전에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나(창 1:1) 땅에 혼돈과 흑암이

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창 1:2).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는 완전하며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데, 창세

기 1장 2절에선 '혼돈'과 '흑암'이 나타나고 있다. 그때는 한 사람도 창조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그래서

사람들로 인해서 혼돈과 흑암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혼돈과 흑암을 야기하신 것일

까?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천지를 혼돈에 빠뜨릴 분이 아니시다. 빛과 어두움을 나누

시는 재창조의 사역을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심히 혼돈된 천지를 새롭게 하기 위해 일하신 것이다. 그렇

다면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오늘날 우리

가 마귀라 부르는 사단이 그 장본인이다. 물론 그 이름은 본래의 이름이 아니다. 이 사단에 대해 알아보

자. 에스겔서 28장 12-17절과 이사야서 14장 12-20절의 두 성경 말씀을 보면, 그 근본이 본래 지혜롭고

아름다운 그룹 곧 천사장이며 "하나님과 비기려"고 함으로써 하늘에서 "땅"으로 (겔 28:17, 사 14:12)

쫓겨난 타락한 천사였다. 이와함께 창세기 1장 2절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는 말씀과 위의 구절 모두 다 '땅'과 연관이 있다. 이로 보건데 사단이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쫓겨난

즉시 땅에 어두움과 혼돈이 임했던 것이다. 마귀가 있는 곳엔 혼돈과 흑암이 있다. 이 혼돈과 흑암은 진리

와 하나님께 대한 혼돈과 무지인 것이다. 말 못하는 땅도 혼돈과 흑암을 경험했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심각한 혼돈과 어두움 속에서 방황해야 했겠는가! 짐작해 보시라! 이 타락한 천사로 인하여 땅이 혼돈과

흑암으로 뒤덮혔다는 것은 땅에서 마귀가 자신의 일을 이미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 순간부터 빛과 어두움, 대기권과 상층권, 바다와 육지, 그리고 밤과 낮을

분리하심으로써 재-창조를 시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기 오래 전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대로 사람을 지으시기로 계획하셨다. 그 계획하신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지으신

새, 물고기, 그리고 짐승등 모든 생물에 대해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으나, 흙으로 그 형태를 만드시

고 하나님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자 생령이 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첫 사람에게 여러가지의 명령을 내리셨는데, 이는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점령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세기 1장 28

절)는 명령이었다. 이에 더하여 창세기 2장 25절 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지키라"는 명령을 하나 더

추가하셨다. 이러한 명령을 내리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복을 내리셨던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의 복을 따른 명령들인 것이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인간을 생각하시며 사랑하셨다.

복을 주신 가운데 내리신 명령들이 인간들에게 무거운 것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는 아담에게 삶과 죽음의 유일한 법칙 이며 아담에게 행복의 유일한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

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단 한가지의 명령을 내리셨다. 그것은 곧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창 2:16-17). 바로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시어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지어셨는데 곧 하와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 있는 각종 새와 들짐승의 이름을 명명하며

아름다운 동산에서 살게 되었다. 에덴동산은 물의 근원이어서 물이 풍부하여 무성한 나무가 있었을 것이어

서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리라 ! 창세기 2장 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

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두 나무를 심으셨다. 곧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생명나무였다. 두 나무 모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왜 '그 두 나무'를 에덴동산 중앙에 심으

셨을까? 여러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사람의 삶과 죽음의 기준 곧 행복의 선택

기준으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살게 한 아담이 선악과 나무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생명나무

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을 놀랍게 만드셨는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피조물!

사람의 선택을 따라 영광을 받고 싶어하시는 완전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렇다면, 선악과 나무는 무엇 혹은 누구를 가리키며, 생명나무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이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자. 어느날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중에 가장 간교한 뱀이 여자와 더불어

대화를 시작하였다. 잠깐 멈추고 생각해 보자. 이 뱀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잘 나타나 있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자라." 이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에 대해 너무나 잘 설명하지 않는가!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연대 차는 수

천년이며, 창세기를 기록한 기자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이는 다르다. 그런데도 이 뱀에 대해 너무나 정확

히 그리고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성경의 무오성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단은 우리와 같

은 몸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의 몸이 필요하다. 여기서 사단은 들짐승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택하여 하와

와 대화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마귀가 하와의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서 속삭이지 못한 것은 그때까

지 마귀가 사람,곧 아담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마귀가 마음대로 드나

들며 마음껏 농락하고 있지만, 아담과 하와가 그의 유혹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기 이전까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마귀는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할 때나, 바로 그 에덴동산 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을 인용하거나 혹은 몇마디 더 추가하기도 했다. 또한 '참으로' 혹은 '할까 하노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

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정면에서 대적하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 되는 말을 할 정도

로 간교하다.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에 거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 마귀는 매우 그

럴듯하게 하와에게 접근하여, 창세기 3장 5절에서 "너희가 그것을(선악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선

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유혹하였다. 이 뱀(마귀)이 하와에게 접근하면서, 선악과나무 바로

옆에 있는 생명나무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선악과 나무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다. 이

는 선악과 나무가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선악과 나무는 마귀를 가리키며

마귀는 선악, 곧 선과 악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대두된다. 대부분의 사람들,특히

종교인들에겐 하나님이 '선'이시고 마귀는 '악'이라고 하는 고정관념과 선입관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

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이 마귀이기 때문에 악을 피하려 하고, 심지어 마귀가 도깨비처럼 뿔이 있고

매우 사납게 생긴 무서운 존재로 오해하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타락한 천사장인 마귀는 매우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리고 뱀이 여기서 하와에게 접근하는 과정을 보면 매우 지혜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귀

가 '악'으로써만 나타난다면, 그는 많은 사람을 이끌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을 갈 것이며

그에게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마귀는 '선(good)'이란 무기가 있다. 이 선 (good)으로

위장하면 아무도 자신의 정체를 눈치챌 수 없다. 마귀는 '선'을 가장하고서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사람들

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가까이 다가 오신 것으로 착각하게 하여 자신에게 속하게 한다. 파탄하

는 가정을 찾아가 보라, 그 상대가 남자든 여자이든 간에 처음엔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고 선하게 보이는

가? 처음엔 얼마나 듣기좋게, 보기좋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접근하는가? 이 마귀는 '선'만을 사용하는 것

이 아니라, '악'도 적절히 혼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지 못하게 한다. 속지 마시라, 이 마귀

를 ! 이 선악을 통하여 결국 자기와 함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가려는 마귀의 속셈을! (요한계시록

20장 15절).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

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욥기 35:6-8)

그러나 불행한 일은 그 마귀의 '선악'을 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선하게 사는 것이 옳으며 악하게 사는 것이 나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태어나면서

부터 수많은 단체나 집단들을 통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악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착하게 살면 천국이나 극락 혹은 환생한다는

교리로 부터 미신이 추구하는 요소까지 가미하여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복락, 즉 선하고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논리까지 매우 그럴듯하고 듣기에 좋은 이야기와 논리들이다. 더우기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치는 기독교에서 조차 선악이 누구를 가리키는 가를 모르는데 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매스컴도 사람들의 선한 일을 조장하며 그러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아시다시피, 마귀는 성경에서 공중(Air)의 권세잡은 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 대중매체를 누가 이용하고

있는 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대중과 공중파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공위성을 이용한

방송이 크게 부각되어 전세계의 소식이나 사진을 신속하고 생생하게 단시간내에 전세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하지만, 그것도 공기(Air)를 이용하고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이 통신 매체를 장악하고

있는지는 너무나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이제 세상을 통치하려면 인공위성을 통한 컴퓨터시스템일 것이다.

마귀는 매우 간교하여 사람을 자기와 함께 불붙는 지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하여 정치가들이 필요로 하는

매체를 십분 활용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마귀는 세계적인 대중매체를 통하여 자신의 선과 악

자체를 선전하고, 이를 통하여 의인이 될 수 있다고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3장 10절

말씀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솔직히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다. 제가 "당신은 의인인가?"라고 당신에게 묻는다면, 그 대답은 어떨까?

아마도 방금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나는 의인이 아니다. 그러나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언론에서 착한 일을 한 사람이라고 보도한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똑같은 질문을 해 보자.

과연 그가 "나는 의인이다"고 말하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가 겸손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리라. 그가 그런 특별한 일을 했다고 해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 대해선 그 자신이 자신의 실제 모습을 더 정확히 잘 알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3장 12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심으

로서, 사람들이 의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죄를 범하고 있음을 드러내신다.

이와같이 독자 여러분에게 "당신은 죄를 짓는가?"라고 묻고, 또한 선한 일을 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그도 역시 저와 여러분과 똑 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직한 사람은

"나는 무수히 많은 죄들응 범하고 살아 왔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fact)이며

실제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론이나 성인의 말이 아니다. 그런데, 죄인이 행한 선(good)도 '선'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언급하셨다. 이것은 사

람들이 볼 때, 한가지 선을 행했다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한가지 이외의 많은 다른 일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성경뿐만이 각자의 양심이 증거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로마서 1장 19절),우리의 죄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우리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죄를 저질렀을 때,

누군가가 우리 이름을 부르면 우리가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는 우리 양심이 우리의 죄를 지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양심과 하나님의 소리에 조금만 귀를 기울인다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선과 악이

아니라, 더 나은 하나님의 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생명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 선악과 곧 마귀를 택한 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쫒아내신 까닭은 죄인인 상태로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할까' 하여(창세기 3장

22절) 쫒아내신 것이었다. 그리고 죄 가운데 에덴동산에 산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큰 고통과 괴로움이

되었으리라. 그래서,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자로 하여금 그 죄 때문에 생명나무의 실과를 더 이상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한 사람만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보건데 생명나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선악과 나무와 생명

나무는 완연히 다르다.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선(good)이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선(good)을

이야기하며, 가르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서도......마귀가 가져다

준 사람들의 선과 악에는 그 기준이 없다. 얼마나 선해야 하며, 얼마나 악해야 한다는 말인가?

또 선이라는 것이 구제하거나, 봉사하거나, 희생하거나, 효도하거나, 그리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도 마귀가 제시하는 "선(good)에 속한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창세기 3장 6절에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

럽기도 한 나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먹음직"도 하고는 먹기에 '좋은'이라고 풀이할 수 있고 "보암직도

하고"는 보기에 '좋은'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마귀가 제시하는 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좋은 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마귀가 제시하는 선은 각 사람의 눈에 좋아 보이고 각

사람의 머리에 그럴 듯해 보이고, 그리고 각 사람의 입맛에 맛있어 보이는 선(good)으로서 엄격한 의미의

보편적인(universal) 선이 아닌 것이다. 마귀는 그같은 선을 사람들에게 제시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안(in

God)에 있는 것처럼 안주하게 한다. 사람들에게 있어 좋은 것이란 각자에 따라 모두 달라서 각자가 좋아

하는 선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되었다. 그래서 그러한 선은 "참된 선"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선은 시대나 장소에 따라 수정이 되며 자주 바뀌기도 한다. 어떤 곳에선 '모자를 쓴 것'이

선이지만 다른 곳에선 '모자를 벗은 것'이 선이며, 어떤 곳에선 '훔치는 것'이 죄악이나 다른 곳에선

'먼저 본자가 먹는 것'이 선이 된다. 따라서 이렇게 자주 변화되거나 모든곳에 적용되지 않는 선은 "참된

선"이 아니다. 그러나 그 선악에 미혹된 하와는 좋아 보여서 선악과 과일을 대담하게 따 먹었고, 그 남편

에게도 주매 아담도 먹게 되었다. 마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벗었으므로 두려워

하여 숨게된 것"만 보아도, 선악이 누구의 소유물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그것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라면 어찌 숨겠는가? 그 선악과는 자신들과 마귀에게만 좋아 보이는 선이었을 뿐이다. 불행하게

도, 오늘날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것이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으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 생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써 우리들이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거짓 선을 알게 됨으로서,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 생명나무의 실과 역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였으나, 그 이후엔 더 이상 생명나무를

보았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 생명나무가 거기 존재치 아니한 것이 아니라 선악(good and evil)이라는

것이 그 생명나무를 볼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존재치 않는 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이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둘째,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눈이 밝아진다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지게 되었지만, 선악에 대해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후에 선악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해서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인 선과

악에 대해 눈이 밝아짐으로서 자신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수치를 알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창조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곧 수치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른 요인들을

수치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수치(벗은 것)를 가리기 위해 손으로 수고하였다. 그들의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다. 아시다시피, 무화과 나뭇잎은 그 자체가 억세고 털이 있는 것이 특징이어서 사람의 신체

에 사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과일 나무의 잎사귀이다. 그들이 수치를 가린다고 노력은 했지만, 결국 그것이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넷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숨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하나님을 피하여 나뭇사이에

숨게 되었다. 그들이 나뭇사이에 쪼그려 앉았는지 혹은 서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쪼그려 앉았다면

그들의 신체적 고통은 더욱 더 심했으리라. 쪼그려 앉을 때, 그 무화과 나무잎 치마가 꺽여져서, 자신들을

위해서 만든 바로 그 옷이 그들을 더욱 아프게 했으리라. 그보다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바로 전날 까지

매일 뵈옵던 하나님을 보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다섯째,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이름을 부르실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

이다"라고 아담은 대답했다. 두려움을 모르던 그에게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

곧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

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어김으로 사망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surely)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에겐 하나님의 형벌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 하는 것도 바로 아담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보다 더 참담한 것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이별인 것이다. 죽음이란 용어

의 뜻중엔 이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보다 더 큰 죽음이 어디 있으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육체를

당장에 죽이지 아니하시고 대신 한 짐승을 죽여 그들의 무화과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해 입히셨다. 여기

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다. 벌써 하나님께선 대속의 죽음으로 하담과 하와를 위해 구원의 길을 예비

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 죽임을 당한 짐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다.

여섯째,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이때부터 변명과 핑계가 시작되었다. 아담은 하나님과 하와에게 그

책임을 돌렸고, 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

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세기 3장 12절)"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그것을 따 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섞인 말을 하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죄를 죄로써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직접 명령

하셨을 뿐만 아니라 에덴동산안의 모든 것을 지키고 보호할 의무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아담은 핑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기엔 어떤 핑계나 원망이 있을 수 없다( No excuse)

일곱째, 그들은 여러 종류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뱀은 배로 기어다니게 되었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

이 크게 더하여 졌으며, 그리고 남자는 종신토록 땀을 흘리면서 수고해야만 하였다. 가장 큰 저주인 인간

의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심판이 내려졌다.

마지막으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쫒아내셨다. 죄인 아담이 에덴동산에 그대로 산다면,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하나님없이도 계속 그 목숨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쫒아내실 수 밖에

없었고, 또한 죄에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없게 한 하나님의 공의를 다시금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결과가 인간의 죽음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 땅에서의 생활에도 고통을 안겨

주는 저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가정을 친히 만드셨고 그들과 교제를 해 왔으나,

다시는 그들이 에덴 동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 화염검을 두어 이들을 지키게 하셨다.

이상에서 보셨다시피, 이것이 비록 아담과 하와란 부부의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오늘날 우리들과 매우

유사하거나 동일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은 - 아담이 생명나무가 아니라, 선악과 나무를 본 것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

이 아닌 다른 것들 곧 하와와 같이 눈이나 입이나 머리에 좋아보이는 것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 : 바로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을 잠시 중단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뚜렷이

보일 것이다. 우리들의 눈이 참으로 보아야만 할 것에 밝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반대의 것들에 눈이 밝아 있다; 돈, 재물, 명예, 지식, 권력 그리고 성적인 것.

그 결과, 어느날 자신들의 수치만을 발견하고 당황해 어쩔줄 몰라 할 것이다. 참된 수치는 옷을 벗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며 그 하나님의 분명한 증거를 무시하는 것이리라. 또한

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죄(罪)가 세상에 어떻게 들어왔으며, 우리의 조상이 어떻게 죄인되었으며, 우리

가 태어날 때 부터 어떻게 죄인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들이 두려움, 책임전가, 수고와 고통, 욕심(눈, 입,

뇌), 그리고 수치를 가리려 하는 노력등을 누구에게서 물려받았는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실 (fact)

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기에 꼭 유의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사실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추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만일에,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한 종교적인 창시자

나 한 민족의 시조의 이야기처럼 미화되거나 전설적 인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아담은 인류의 첫번째

사람으로 생각하기에 따라선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미화되고 전설적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셩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의 조상,유명한 성인이나 종교지도자들

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거기엔 매우 그럴듯한 그리고 교훈을 줄 만큼 감동적이고 훌륭한 이야기들만 즐비

하지 않는가!

아담과 하와는 부부이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됨과 아울러

성공적인 부부(successful couple)가 되기 위한 교훈도 얻게 된다. 이들이 부부이면서도, 하와가 그 남편

과 함께 하지 않았을 때, 유혹을 받았다는 아주 간단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뱀의 유혹을 받았

을 때, 남편에게 가서 어떤 조언을 구하지 않고 자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하거나 추가하는 등 하나님

의 말씀을 거역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서,

온갖 욕심이 그들에게 생기게 되었다, 자신이 선악과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이를 권했다. 물론

남편 아담이 하와의 유혹에 따라 먹은 것인지, 혹은 자기 자신이 원해서 그 선악과를 먹었는지에 대한 기록

은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아내가 선악과를 주자 그가 즉시 받아 먹었다는 것이다. 그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추궁하시자, 아담은 하와에게, 그리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생겼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데도 아담과 하와 곧 부부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부부간에 문제가 있음으로 해서 죄(罪)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와는 남편 아담과 함께 있지 않았다. 자기가 직접 받은 명령

이 아닌데도 주제없이 그 명령에 대해 언급하며,그 명령에 대해 남편에게 묻지도 않았다. 문제가 생기자

서로 책임전가를 하기에 급급했다. 아담은 아내를 돌볼 책임이 있었지만 당시에 함께 있지 않았고,아내가

유혹했을 때, 선악과에 대해 한마디 언급없이 덜렁 받아 먹었을 뿐만 아니라 책임전가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하와에게 있었던 몇가지 사항들은

요즈음 여성들에게도 있다. 과거 전통적인 사회에선 엄격한 관습앞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을 억제하고

살아왔었지만, 요즈음 대부눈의 여성들을 보라! 자기 남편을 돕는 배필로써 돕는다거나 순종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하와가 저지른 일을 반복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남편은 어떠한가? 요즈음 남편은

자기 아내를 돌보지 않고 자녀와 함께 지내는 것 보다는,돈을 버는 일에 치중하여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의무

를 다하지 않으며 자신도 그 욕심을 따라 살아 문제가 생겼을 땐, 아내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곤 한다. 사실

남편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아내 보다도 더욱 더 크고 중요한 의무를 지고 있다 할 수 있다.

부부 여러분! 부부생활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될 때,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며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에베소서 5장 22절-25절). 가정생활이 비정상적일 때, 자기 자신과

부부, 자녀, 부모 그리고 사회 전체에 파탄과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죄

에 빠진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라! 부부가 이같은 삶을 살 때, 가정엔 불행이 찾아 온다. 당신의 부부생활

은 어떠한가? 누구에게나 부부문제가 있다. 부부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남들도

그런데 하면서 그냥 어물어물 넘어가는가? 부부생활을 포기하려 하는가? 문제를 가슴에 묻어버리는가?

아니면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다른 방법을 찾는가? 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문제는 당신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문제를 풀려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문제가 많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상 그 문제들은 "죄"에서 기인하는 것들

이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한번 가 보라. 하나님께선 당신 자신의 심령과 생활을 변화시킬 것이다.

당신만 변화를 받으면 상대도 변화를 받게 된다. 상대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을 수

도 있지만,자신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닥친 문제가 서로에게 동일한 문제

이듯이 우리에게도 그러하다. 빨간 안경을 쓰고 보면 온 세상이 빨갛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 세상이 파랗게 보인다. 매우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큰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문제

가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없으면 상대방에게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이 책을 쓰는 저도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고통스러워 한 햇 수가 수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결국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하고 얼마나 민망

했는지 모른다. 당시엔 행복이 다른 곳과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참 행복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가죽옷은 무화과나뭇잎 옷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옷이다. 무화과 나뭇

잎 옷은 인간의 손으로 지어졌지만, 가죽옷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졌다. 무화과 나뭇잎 옷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었지만 가죽옷은 편안한 옷이 되었다. 무화과 나뭇잎 옷은 일시적인 소모품에 불과하였지

만, 가죽옷은 거의 영구적인 옷이었다.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것이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은,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님께 속한

부류와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말씀하셨

는데,'머리를 상한다는 것'은 치명적이어서 회생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는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

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전한 승리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은 치명적인

상처가 아님을 누구나 다 잘 알 수 있다. 발꿈치란 껍질이 단단하여 그렇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없다. 그래서'발꿈치를 상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며 '치명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그의 '부활'을 나타

낸다. 이 죽음은 가죽옷을 통해 더욱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는데, 그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 수치를 가리려고 손으로 수고하나 사람들은 결국 고통과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어찌 사람들의

수치를 사람의 손이나 노력으로 가릴 수 있으랴!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금가락지를 끼고, 좋은 승용차

를 타고 보안장치가 잘된 저택에서 산다 할찌라도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하지 않겠는가! 땅속 깊은 곳에

숨을 곳을 만든다 할찌라도, 혹은 달나라 높은 곳에 있는 우주 저택에 산다 할찌라도 인생이 알아야 하는

것은 그 두려움이 우리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두려움을 제거하는 방법을 당신은 아는가!

그 두려움의 원인인 자신의 죄(罪)을 시인하고(Confess)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와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당신의 죄를 왜

숨기려 하는가? 그 죄를 숨기려 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 큰 괴로움과 공포로 떨어야 할 것이다. 그 두려움

으로 인하여 숨거나, 타인에게 그 책임을 (범죄한 책임)전가한다고 해서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독자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게시리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독자 여러분의 눈을 여셔서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만남으로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리시기를 원한다. 왜 거기서 주저하는가?

독자 여러분이 새로운 진리를 들어 다소 당황해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나아가 보라.

거기엔 길이 있으리라! 참되고 진실된 지금까지 여러분이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 사실을 확인해 보라!

그 사실 앞에 누가 굴복하지 않겠으며, 누가 감복해 하지 않겠는가? 사실에 대해 눈을 감거나 귀를 막지

말고,매우 바쁘겠지만 잠깐 멈추어 하나님께 시간을 드려 보라 !




Ⅱ. 가인과 아벨 / 최초의 형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천사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시고 에덴동산을 지키게 하셨다. 이제 더 이상 아담은 하나님과 더불어 매일 교제할 수 없게

되었고, 더구나 무엇이든지 항상 임의로 먹고 즐길 수 있었던 에덴동산의 생활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그 에덴동산에 다시는 들어갈 수 없게 되어 마음으로 고통의 세월을 보냈으리라. 그가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이후에 두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의 이름은 가인이며 둘째는 아벨이라 이름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성장함에 따라 직업를 갖게 되었는데, 가인은 농부이었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다. 따라서 가인은

일년 내내 밭이나 들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야만 했던 반면에, 아벨은 양과 더불어 생활함으로서

비교적 한가로이 양에게 물을 마시기 위해 잔잔한 강으로, 그리고 싱싱하고 깨끗한 풀을 뜯기기 위해 푸른

초장으로 양떼를 데리고 다니는 일을 하곤 하였으리라. 필자 생각엔 당시에 이리나 늑대가 양떼를 늑탈

하는 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왜냐하면 말 못하는 땅이 저주를 받고, 동물들이 사나와

지는 것은 사람들의 죄악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제사의 유래가 여기에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창세기 3장 15절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이

어느날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죄를 대속해서 죽으셨다가 부활한다는 예언과 창세기 3장 21절 말씀의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장면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가 어떠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실제로 그러한 제사를 드린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성경에 이것에 대하여 분명히 기록

되어 있진 않지만, 다음의 그의 말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을 계속 인정하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가인을 낳았을 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세기 4장 1절)"라고 말함으로서, 아담이 쫓겨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

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하신 일을 인정하고 선포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셋을

낳았을 때도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창세기 4장 25절)"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때, 분명히 한 짐승이 죽임

을 당하였다는 것은 자신들의 눈에 선하게 기억되었으리라. 에덴동산의 그 짐승이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대신 죽임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긍휼을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경험하였다.....

죄없는 짐승이 죽임을 당함으로 자신들의 수치가 가리워지게 되었기에, 그들의 마음 속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들은 대신 죽은 짐승이 가리키는 죄악을 없이하실 구속주가

오시길 기다리는 삶을 살았으리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들들에게도 충분히 그 사실을 가르치고 실천케

했으리라. 여하튼, 추수 때가 되어 가인과 아벨은 그들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가인

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삼았다.

자,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의 직업상, 자신들이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에

선과 악의 문제가 대두된다. 가인은 열심히 일해서 얻은 소산 곧 땅에서 추수한 것들로 제물을 드렸는데,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으니, 어떻게 보면 곧 인간의 상식으로 보아 아벨은 가인만큼 열심

히 일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경험한 바와 같이, 직업이라고 해서 모두 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니다. 직업마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도 있고, 몸으로 남보다 더 적게 일하는 직업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편하게, 더 쉽게, 그리고 땀을 적게 흘리고도 고소득을 얻는 직업을 가지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며 이를 위해 자신들의 자녀로 하여금 더 열심히 공부를 하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실상이 아닐까?

이와같이,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살펴보면, 기인은 쨍쨍 내리쬐는 햇볕아래서 땀을 흘려야 했고,더 많은

날을 일하는데 보내야만 했으나, 아벨은 양떼가 푸른 풀밭에서 깨끗하고 싱싱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동안

눕거나 나무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거나 명상에 잠길 수 있었으리라. 또한 양들을 잔잔한 물가로 데려다가

물을 마신는 일을 했으리라. 양들이 물을 마시는 동안, 그는 물장난을 칠 수도 있고 몸을 씻을 수도 있었

으리라. 이로 보건데, 육체적인 노동은 가인이 아벨보다 훨씬 더 많이 한 것이리라. 우리는 두 가지 제물

중 열심히 일한 가인의 제물을 더 나은 제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선악관에 따른 판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아벨의 양과 기름을 열납하셨고,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으셨다(창세기 4장 4-5

절). 최소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의미는 죄를 사하는 것과 관련된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인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 22절 말씀

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생명이 피에 있기에, 피가 죄를 속한다"(레

17:11)는 말씀과 관련된 말씀이다. 물론 그 구속의 피는 죄없는 '피'이어야만 하리라. 인간의 선악을

따른 판단은 당연히 가인에게 선을 부여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죄의 구속과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시자, 가인은 매우 화가 났고 그 얼굴 빛이 변하였다. 그 자신의

입장에선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인은 열심히 일했고 자기가 추수한 것들 중에 가장

탐스럽고 빛깔 좋은 것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줄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화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가인이 별 가치없는 농산물을 드렸다면 어떠했을까? 그렇다면,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

을 것이다. 우리가 별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일이나 공부가 잘못되었을 때, 그렇게 큰 타격을 입지 않으

나,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돈을 투입한 일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가 받은 실망과 좌절은 얼마나 컸든

가? 농삿꾼인데 어쩌란 말인가? 가인은 당연히 자신의 선악에 따라 하나님께서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가인이 '선하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였다. 창세기 4장 6절부터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

니라" 여기서 가인이 '선'이라고 생각한 것과 하나님께서 '선'이라고 하시는것 사이엔 커다란 차이(Gap)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가인이 생각한

선과는 아주 다른 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을 행하면,

그 낯(얼굴)을 들 수 있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듯이 가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가인 역시 아벨과 같이 죄의 속제제사의 뜻과 형식을 잘 알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그런데도 가인

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인한 선을 고집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여기서 선으로 나타내는 참된 제물을

거부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말씀하심으로서,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그에게 항상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것(sin lieth at the door)'은 사람이

들어가고 나가는 데 꼭 통과해야만 하는 문에 있다는 의미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에겐 '죄가 항상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죄가 있는 사람은 그 죄의 소원이 있을 수 밖에 없으리라. 가인에게도 죄의 소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하신 것은 최종책임은 가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죄를 인격으로 his 혹은 him으로 언급하시는 것을 보면 이 죄란 아담에게

찿아 온 뱀속에서 유혹한 마귀를 가리킴이라. 로마서 5장 12절 말씀에서,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그 죄가 인격으로 나타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속죄와 관련된 선과 마귀가 유혹하는 다른 선 곧 두가지 종류의 선

이 있음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는 선악에 따른 인간의 판단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정

하시는 더 나은 선 곧 죄의 구속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에겐 가장 중요한 선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

서 말씀하시는 '선'은 생명과 관련되는 것이며, 영생이란 죄의 사함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선'이 어디에 있겠는가? 선을 다시 한번 더 상기해 보자. 이것이 인간에게 '좋은'것을 의미한다는 것

을 독자 여러분께서 상기하시리라.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의 노력인가, 아니면 노력

하지 않아도 얻는 것인가? 물론,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은 노력하지 않고서 얻는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에게 노력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구속의 은혜를 더 좋은 것으로 간주하신다. 그 구속의 은혜는 사람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저(Free) 얻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력하는

그 자체를 '선'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러한 사상은 종교가 표방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사람의 노력이나 기부를 요구하시겠는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면 더 나은 '선'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욱 더 명백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선하신 분"이

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유일하게 선하신 분이시며 완전한 선을 소유하신 하나님에 의해 행해지는 보편적

인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미하시는 선인 것이다.그것이 더 나은, 더 좋은 선이다. 우리가 쌓은 선악도,

그것이 좌절되던 날, 얼마나 큰 허탈감과 실망을 맛보았던가? 가인은 자신의 노력의 선으로 자랑하려

하였으나, 아벨은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이를 자랑하였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더 나은 선(good)

을 사모하여 처음 태어난 어린양과 그 기름을 드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접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더 좋은 것은 착하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구속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상과 같은 말씀을 하면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살아

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마귀가 인간에게 심어 놓은 각양각색의 선 곧 인간의

노력으로 말미암는 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시는 선이 따로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사람들마다 그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받는 일들을 우리는 무수

히 보아왔다. 문제는 '그 선이 누구로 부터 왔는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아니면 인간의 노력

으로? 이는 자신의 잣대에 의한 행위의 의나 선보다 창조주의 말씀과 능력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행위의 선과 악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더 나은 선인 하나님의 의와 선을 구하겠는가? 가인은 인간의 행위

에 따른 선악으로 분노하게 되었고, 분노가 가득차 '불그락 푸르락'한 안색으로 하나님께 씰룩거리게 되었

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을 찿아 오셔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뇨"라

고 질책하셨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자기 아우 아벨에게 이야기한 것

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로 보건데 가인은 아벨과 인간적으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하였

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아벨에게 이야기할 정도로 육신적으론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그러나

그 후에 가인이 들에서 아벨을 쳐서 죽이게 되었다. 그 배후엔 누가 있었을까? 가인이 자신의 제물이 열납

되지 않아 크게 화가 났어도, 그리고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어도 그 즉시 어떠한 악한 일도 하지 않았다.

육신을 주장하는 그 죄(sin)가 선악을 따라 살고 있던 가인에게 미운 마음이 생기게 하여 그를 충동질하였

던 것이다. 마귀가 다스리는 인간의 선악엔 증오와 시기가 도사리고 있어 이러한 결과를 초래되었다. 아담,

하와,가인, 그리고 아벨, 모두 합해 네사람만 살던 시기에 그러한 일이 일이 일어났으니 행위로 말미암는

선악이 참으로 무섭기 짝이 없다. 선악을 따라 살았던 가인의 선악이 무너지던 날,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았으리라. 그러한 순간을 마귀는 결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서 다시 가인을

찿아 오셨던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마귀는

가인에게 '들판에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속삭여 그로 하여금 범죄케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면서 그의 죄의 상태를 깨닫게 하려 하셨듯이, 가인에게도

"어디"라는 말씀으로 가인의 범한 죄의 상태를 가인으로 하여금 깨닫게끔 하려 하셨다. 하나님께서 모르셔

서 이를 물으신 것이 아니다. 단지 회개의 기회를 가인에게 주기 위해 이것을 질문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꾸중하고 책망하려고 이를 물으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 곧 아담의 후손들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죄를 자꾸만 숨기려 한다는 것을 수 없이

보아 왔다. 그러자, 가인은 하나님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뻔뻔

스럽게 반문하였다. 죄는 이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되게, 거만하게,그리고 무지하게 만든다. 여기서

가인은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대담하게 하였다. 우리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에 대하여 힘있게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가인이 '하나님께서 정말 그 사실을 보지 못하셨고 알지 못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귀가 얼마나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모르신다고 유혹했기에 ?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 44절 말씀에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마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음으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볼 때, 가인이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나 살인을 하게 된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선,

처음부터 살인한 자로 마귀를 지목하였다. 가인이 살인한 때도 마귀가 작용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선 첫

살인자로 가인을 지목하지 않고 마귀를 지목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가인에게 물으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서 직접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듣기를 기대하셨다. 연이어

하나님께서는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가인

이 아벨을 쳐 죽여 땅에 묻었다는 것을 보셨고 또한 아신다는 것을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이 죄악에 대한

증인으로 '땅'을 지목하였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이란 말씀을

통해 대자연도 인간의 범죄에 대한 증거의 역할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땅에서 피하고 도망다녀야만 하는 저주를 내리셨고, 가인이 땅을 밭 갈아도 땅이 그 효력을 다시는 예전같

이 내지 못하였다. 그제야 그는 자책과 두려움을 느껴 하나님께 그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간구하였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세기 4장 13-14절)

가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벌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not bear).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서 쫓아내신다는 것

셋째, 자신이 하나님의 낯을 뵈올 수 없다는 것

넷째, 자신이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


하나님께선 두번이나 가인을 찾아가 기회를 주었지만, 그 기회를 놓친 가인!

막다른 골목에서 손을 들고 항복하는 미련한 인간이여!

결국 가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지만, 두번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여전히 사랑을 베푸셨다.

창세기 4장 15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표를 주신 하나님!

그리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4장 16절에서 그가 하나님을 떠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도 아무런 문제도 없는 양 겁없이 살아간다.

과연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까?

아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 삶이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깊이 상고해 보아야만 한다.마귀는 교묘하게 '선'이란 용어를 혼돈시켜, 가인으로 하여금 자신

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들지만, 결국은 그 선과 악이 사람 곧 자기 친동생을 아무도

보지 않는 "들"에서 살인 하는 일까지 저지르게 된 가인의 후예를 보라!

참담하게 살아 가던 중, 결국 노아 당시의 홍수로 몰살당하여 죽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혈육의 형제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욕심을 부리며, 서로 시기하고, 서로 미워하

며, 그리고 서로 비방하는 현 세태는 우리 조상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며, 그 배후에서 마귀가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두번씩이나 가인을 찾은 것과, 가인이 실제로

범죄했으나 마귀를 지목한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귀는 미워하나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참된 형제우애가 가능해진다. 따라서,형제우애

는 위로 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이러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말씀에

귀를 기우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당신의 귀를 드려보라! 그러면 행복한 형제 관계가 설정되리라.

그렇지 않으면, 이 땅에서 그러한 형제 우애를 맛보거나 누리지 못하리라.




Ⅲ. 노아의 세 아들 / 자녀의 부모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죽은 아들 아벨 대신에 다른 아들을 주셨는데, 그 이름은 '셋'이었다. 에녹

은 '아담'의 칠대손이며 '셋'의 육대손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 이 땅

에 있지 않았고, 에녹의 삼대손인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고 이름을 노아라고 불렀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comfort)"는 것이었다. 노아의 아버지는 왜 이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으며, 누가 이 저주를 내리셨는지를

잘 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라멕은 그 저주로 인하여 자신과 사람들이 수고로이 일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땅의 저주로 인하여 그는 수고와 고통의 삶을 살았으므로 자신이 위로받기 원한다는 소원을

그 아들의 이름에 담았다. 이 라멕은 이러한 수고와 고통 속에서도 또 하나의 위안을 기다렸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저주와 고통을 운명으로 돌릴 수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기에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련만, 노아의 아버지는 그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모색하고 위로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었던 것

은 그 아버지 라멕의 본(example)과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라멕의 삶을 아들 노아는 보아 왔고 그 삶을

노아가 이어가게 된 것이다. 아멘,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린 라멕의 믿음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노아는 500세된 후에 세아들을 낳았다. 그 당시의 상황은 이러하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할 때

에 사람의 딸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던 것이다(창세기 6장2절). 여기에 사람의 딸이라는 용어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두가지 용어가 나온다. 사람의 딸들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누구를 가리킬까?

사람의 딸들이란 사람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가리키는가? 그것이 아니다는 것은 우리가

명백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천사는 결혼할 수 있는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

겐 결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사람의 딸들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여 (렘 17: 9-10),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따라 자기들의 좋아하는 사람의 딸들(곧 하나님을 모르는 여자)을 그들의 아내로 취하게 되었다.

고린도후서 6장 11-18절 말씀에서, 믿는 자들에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말씀

하신다. 이혼이 급증하고 있는 요즈음 이 말씀은 더더욱 강조되어야 하고 그 필요성이 더욱더 돋보인다.

그리스도인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누구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는가? 연이어 바울은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

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겠는

가?"라고 고린도에 있던 그리스도인들과 우리들에게 반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이 십자가로 값주고

산 새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와처럼 우리눈에 좋아 보이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쫓아가는 것이 옳겠

는가? 하나님께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not strive with man) 이는 그들이 육체

가 됨이라"고 선언하셨다. '육체가 됨'이란 말씀은 "육(flesh)"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그들의 연세 곧 인간의 땅위의 생존 연한이 120 년으로 단축되게끔 하셨다(창세기 6장3절). 인간의 수명이

줄어든 것도 이로 보면 인간의 죄에서 기인한 것이다. 당시에 사람들의 몸집에 대해서도 언급하시는데,

그들의 몸집이 컸다(거인)는 것은 네피림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할 줄 몰랐다는 것을

창세기 6장에서 알 수 있다. '그 후에(also after that)'란 용어는 '그 후에도'로 번역됨이 마땅하다.

이는 '어떤 일 이후에도'를 가리키는가? '그 후'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의 연세

가 대략적으로 120세로 한정된 '후에 도 역시'를 가리킨다. 여기서'도(also)'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후,그들은 똑같은 일을 계속행하였음을 나타낸다.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해 자식

을 낳게 되었는데, 그들이 낳은 자녀들은 고대에 유명한 용사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당대의 사람들

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찼음(great)을 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의 계획(imagination;상상)

이 항상 악하였음도 보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repented;후회하시

고),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찼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땅에서 쓸어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때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도 범죄한 사람으로 인하여 함께 쓸어 버림을 당하게

되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가고 시집가는 일에만 몰두 하였다(누가복음 17장27절).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당시 사람들의 마음도 악하

였다. 마음이 악하여 온갖 더러운 일을 서슴치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마음에선 살인과 간음과 음란

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과 같은 것들이 나온다고 말씀하신다(마태 15:19-20).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실망하셨다. 이는 부모가 부모를 모르는 자식을 보고 "차라리 낳지 않았으면"하고 한탄하는 것과 같다.

이는 부모된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일이 아닌가! 한탄과 근심이 교차된 것은 하나님의 심오한

마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한탄은 심판을, 그리고 근심은 피할 길을 마련케 한다. 그 가운데 은혜를 입은

사람은 노아와 그 가족이었다(창세기 6장8절).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노아가 자신의 행위 곧 행위의

선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상대방의 행위나 말에 따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선물과 같이 임의로 거저 혹은 값없이 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선물은 무언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지만,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우리 같은 인생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는가?

노아도 특별한 사람이라기 보다 우리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앞에 나가게 된 자이다.그런데,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과연 어떠한 자이었을까? 창세기6장 9절 말씀에서, 노아는 의인이며, 당세에 완전한 자

로써 언급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선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그가 어떻게 의인이 되었을까?

이는 여기서 은혜로 의인이 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의를 구분하신다.

의에 대하여 로마서 5장 1절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말씀한다. 의는 행위로 말미

암지 않는다. 인간의 불완전한 선악은 행위에 좌우되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의인이다. 또한

그는 완전한 자로 언급된다. 이 완전이란 것도 행위로 말미암은 것일까? 이 역시 계속되는 이야기에서 언급

되듯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노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었다. 동행한다는 것은 뜻과 마음이 같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곧 노아의 뜻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노아에게 전수될 수 있엇던 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생명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자신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에게서 나와야 가능

하다. 시일이 흐르면 흐를수록 당시의 사람들의 행위가 더욱 더 강포하고 패역하여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땅을 함께 멸하려는 계획을 노아에게 미리 알리셨고,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각종 생물이 들어

갈 방주를 준비하게 하였다. 그 방주의 규격과 자재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셨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다. 결국 노아는 그 가족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 그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고 40일

주야 동안 하늘에서 억수같은 비와 지하에서 샘이 터져 나옴으로써 생기 있는 모든 생물이 모두 땅에서

몰살당하였다. 노아 가족은 이 무서운 홍수에서 구원을 받게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또한 하나

님께서는 노아에게 무지개로 언약을 세우셨다. 곧 물로써는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 8명 뿐이지 않았는가! (벧전 3:20) 그 숫자

에서 보듯이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는데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롬

3:20).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노아에겐 아들 셋이 있었다. 이들은 셈, 함, 그리고 야벳이었다. 노아는

홍수 후에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다. 어느날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었다. 바로 그때 우연히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간 함이 그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와서 두 형제

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셈과 야벳, 두 형제는 옷을 가지고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을 쳐 그 천막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에 덮었고 그들은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다 (창 9:20-23). 이 일은 어떻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여기서도 선악이 대두되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독자 여러분! 사실 실수를 한 사람은 노아 자신이며,

노아가 다른 사람에 의해 비판을 받아 마땅한 사건일 수 있다. 실제로 사람의 선악이라는 잣대에 의하면,

노아가 잘못한 것이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데 있어 그 무슨 행동이냐고 나무랄 수 있다. 그것을 제대로

본 사람은 바로 "함"이다. 아버지가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술에 취했을 뿐 아니라, 벌거벗고 누워 잤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하는가? 이 현장을 함이 보았고, 행위의 선악에 따라 비판을 했던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직접 이 광경을 목격하였다면 어떠하였겠는가? 사람편에서 보면 참으로 당연하지만, 그 선악

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인간의 선악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곧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

6:1). 이 말씀과 같이 자기 부모를 공경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실수를 전해

듣고도 그 선악의 판단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원리를 따르게 되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부모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든지, 그리고 행동을 잘 하든지 아니면

그 행동이 그릇되든지 간에 부모의 상태와 상관없이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주안에서" 공경하라

는 것인데 "주안에서"란 부모의 행위나 말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이 어떠하든지 공경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행위의 선악에 대한 판단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물론 함은 보이는

대로 판단한 것이다. 그가 본대로 자기 형제들에게 전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몰랐다. 출애굽기 20

장 1-17절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은 크게 두가지고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부분

은 하나님께 대한 명령이고 뒷부분은 사람에 대한 명령인 것이다. 그 뒷부분의 첫째 명령이 곧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독자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라!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순리인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선악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려고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선악으로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의 행위나 말이 옳바를 경우에만 공경한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부모 뿐만 아니라, 자신도 옳바른 행동만을 하고 살고 있는가? 아니다,

부모의 행위를 따라, 곧 선악을 따라 부모님을 공경하려면, 어떤 부모님도 공경받을 수 없으며 또한 우리

도 부모님을 존경할 수 없다. 그래서 "주안에서"공경하라는 것이다. 함은 선악에 충실했고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원리 곧 생명의 원리에 충실했다. 하나님의 원리 곧 생명이 행위의 선악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함은 저주를 받아, 그 후손이 오늘날 까지 고통 속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다시 말하면,

그 후손이 흑인이 되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지 않는가? 한 가정에 선악을 따른 판단이 나타난 이야기 속

에서 행위의 무서움이 어떠한가를 잘 알 수 있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행위의 선악으로 가정의 평화가 있겠는가?

선악으로 부모공경이 있겠는가?

결코 아니다. 자기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치 않는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지 않으시

기 때문이다.독자 여러분에게 부모님이 있다면 공경해야 한다- 이것은 율법이라기 보다 선악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원리인 것이다. 선악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면 몇가지 축복이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되어 있다:

첫째, 땅에서 오래 살게 된다(출애굽기 20장 12절)

둘째, 형통하게 된다(에베소서 6장 3절)

당신이 누군가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다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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