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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과 이스마엘
200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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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창세기 21장 8절부터 11절 말씀을 통하여 아브라함 가정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여러분과 함께 살
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노경 곧 100세에 그리고 사라의 나이 90세에 하나님의 약속하신대로 사라가 아
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그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21장 8절에서 그 아들 이삭이 자
라 그 젖을 떼는 것 곧 이유하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물론 이삭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랐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은 그 어머니 사라로부터 크나큰 관심
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은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극소수의 어머니들을 제외하고 어머니의 모유로 귀여운 아기들을 양육하기보다 분유로 키우곤 하기 때문입
니다. 모유가 분유보다 좋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그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서 그 사랑이 그 아기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모유를
먹이는 과정에서 전달됩니다. 그런데 모유를 먹이지 않으면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이 아기에게 전달되지 못
합니다. 그 사랑은 어떠한 교육보다 나을 것입니다. 사랑은 교육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사
라는 그 외아들 이삭을 모유로 양육하였습니다. 그 아들 이삭이 젖을 떼던 바로 그날, 아브라함은 그 아
들 이삭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따라 한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신
아들의 성장을 인하여 기뻤기에 그러한 연회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의 가정에 하나의 사
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육체적인 조건
을 따라서는 낳을 수 없었던 아들을 그것도 노년에 낳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들의 일
거수 일 투족이 신기하였을 것입니다. 사라는 또한 그 아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그 아들 이삭을 지
켜보았고 그 아들을 돌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아들 이삭을 바라보고 지켜보고 있던 중에, 사라
는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자신이 낳은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곧 조롱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라는 분개하였고 기분이 심
히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가서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여종
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라의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매
우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이집트 태생, 사라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도 자신의 아들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이스마엘이 그의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뿐만 아
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을 하실 때,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하나님께 말
하기도 한 바로 그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을 낳기 전 까진 아브라함이 사랑하고 아끼던 아들이 바로 그 이
스마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사라 자신도 그 이스마엘을 안고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사라가
하갈 자신의 여종을 통하여 아들을 얻으려 하였기에 그 얻은 아들 이스마엘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를 아꼈
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사라에게도 아들을 하나님께서 낳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 사라의 그
종전의 태도가 바뀌었고 그 아들 이삭을 희롱하는 이스마엘을 참을 수 엇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
과 그 여종 하갈 곧 이스마엘의 어머니를 내어 쫓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심히 괴로
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신분은 사라의 여종이었고 이집트여인이었지만, 그에게 이삭을 낳기 14년
전에 자신에게 아들을 낳은 여인이었기에 그가 사랑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녀가 비록 본처는 아니고 자
신의 첩이었지만, 자신에게 아들을 낳아 준 아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하갈이 아브라함과 함께 이
미 십 수 년을 함께 살아 온 여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라가 쫓아 내라는 아들 이스마엘도 십 수 년
간 사랑하고 아끼던 아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이스마엘의 나이는 적게는 십오세였고 많이 본다면 20세였
을 것입니다. 이는 이삭이 얼마나 오랫동안 젖을 먹었는 가에 좌우됩니다. 이미 이스마엘은 청년이 되어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제 아브라함도 그 아들 이스마엘을 의지하고픈 마음이 들 정도로 성장해 있었든 것
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이스마엘과 정이 많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그
아들과 그 첩 하갈을 쫓아내라고 하였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
신 이삭으로 인하여 큰 기쁨으로 살고 있었지만, 그 아들 이스마엘로 인하여, 그 아들 까닭에 크게 번민하
게 하였습니다. 11절에 ‘그가 심히 근심이 되었더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아브라함 그는 분
명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육신적으로 낳은 아들에 대하여서도 그처럼 괴로워하였
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육신의 일로 인하여 괴로워 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은 괴로웠습니다. 그 괴로움이 왜 그에게 찾아 왔을까요? 예,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얻기 위해 육식적
인 방법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얻은 이삭이 희롱을 당하게 된 까닭도 그 어머니가 육신적인 방법
을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라 자신이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하
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적인 그리고 육신적인 방법을 따라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그 육신적인 방법은 곧 사라가 자신의 여종을 아브라함과 함께
동침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 가정에 문제가 방생한
것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 살면 그 결과는 하나입니다. 사람이 육신적으로 살면, 육신적으로 살아 간 사람
을 포함하여 그 온 가족이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 하
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라가 낳은 이삭을 희롱한 사건에서 우리가 살펴보듯이, 그 일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심히 근심하게 되었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함으로 사라가 분개하였으며, 그리고 이삭은 그 부모가 저
질러 놓은 것으로 인하여 이유 없이 이스마엘로 부터 희롱을 당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육신적으로 사는 것
이 당시에는 즐겁고 유쾌한 것 같고 무슨 일이 성취되는 것 같으나 실제론 고통과 슬픔을 가져다주고 그
일의 종국엔 고통이 따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말하면서
한 말 중에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
한 말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그 말을 자신의 아들을 희롱하는 단계에 아브라함에게 하였습니다. 그 사라
의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 사라의 말을 듣고도, 곧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지만 그 말이 그
의 귀에 깊이 들어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한다는 말이 그의 귀에 쟁쟁하여 괴로
워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육신에 대한 말이 사실이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 오히려 자신
의 육신을 더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아브라함과 같이
그 육신적인 말을 더 따르려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귓전을 맴돌다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육신은 육신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언하시는데 있습니
다. 아무리 그의 비밀을 많이 보인 아브라함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가 언
급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움직이지 못한 것은 그가 그 말씀을 듣기는 하였어도, 그리고 그 하나님
의 말씀을 머리로 이론적으로 알기는 알았어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그 육신을 따라 심히 근심하였던
것입니다. 육신은 이렇듯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창세기 21장 12절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가 저
질은 육신의 씨로 인하여 괴로워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사람
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모습을 여기서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아 오셨다는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먼저 찾
아오셨다는 것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는 또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
리의 죄의 문제를 처리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어 벌써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
해 놓으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들이 그 십자가에서 모두 다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사랑
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종교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은 살아있
는 신앙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비록 자신의 육체로 말미암아 낳은 그 아들 때문에 매우 근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는 사라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고 오
히려 사라의 말로 괴로웠던 것입니다. 사라가 말한 그 말을 성경에서 인정한 것을 갈라디아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4장 30절은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요
한복음 8장 35절에서도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라고 말씀되고 있습니
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그 말씀을 깊이 깨닫지 못한 아브라함은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1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네 아이나 곧 이스마엘이나 네 여종 곧 하갈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근심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괴로워 한 것은 자신이 육신으로 낳아 기른 이스마엘로 인한 것이었습니
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괴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육신으로 그리
고 육신으로 말미암은 그 결과로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괴로워하고 있
는 아브라함이 들을 수 없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 육신적인 정으로 괴로워 하는 아브라함이 그 하
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육신적인 것으로 괴로워 하는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육신적인 것으로 더 이상 근심치 말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가 저지른
그 육신적인 것 곧 그 죄로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더 이상 그 죄
로 근심치 말라는 것은 무엇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가 저지른 죄를 그냥 무마하시는 하나님
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죄에 대한 댓가를 반드시 요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에 죄에 대한 댓가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 율법의 형벌을 따라야만 듯이 그 율법은 죄에 대한 확실한 형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는 용서란 단어가 없습니다. 율법에는 그 죄에 대한 형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그 죄에 대한
대속은 있습니다. 그 대속이란 그 죄에 대하여 누군가가 죽음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당시에 죄
를 지었을 때, 그 죄에 대하여 짐승들이 그 죄지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으로 그 사람의 죄가 사하여지는
대속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한 방식의 대속 곧 용서란 그냥 되어지는 용서나 대속이 아니라 대속물로 말
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지은 육신적인 죄에 대하여 더 이상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
님의 말씀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그 죄가 이미 치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
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죄의 값은 사망 곧 죽음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은 그 죄의 형벌은 곧 죽음입니다. 이는 그 죄를 처리하기 위해선 곧 그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선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죄의 형벌을 우리가 받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죽
어야 하겠습니까? 수없이 많이 죽어야만 되는데 우리는 한 목숨 밖에 없어 죄로 부터의 사면은 불가능하였
습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들 때문에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
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더이상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서입니
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 중에서 ‘근심치 말라’는 말씀 속에 숨겨진 말이 있
음을 우리는 발견해야만 합니다. ‘근심치 말라’는 말씀에서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
라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지은 죄에 대하여 근심치 말라는 말씀과
도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대속의 죽음을
아브라함에게 간접적으로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그 죄들의 대속주
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근심치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독
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죄의 용서를 염두에 두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근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
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한 말들은 모두 다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
라가 한 말은 두가지로써 하나는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그가 이삭과 함께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비록 사라가 이스마엘로부터 그 아들 이삭이 희롱을 당하자 그것을
보고 한 말이긴 하지만, 그 말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들어야 함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하
여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상태를 발견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근심은 사람이 보기엔 옳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그 아들을 차마 쫓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
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습니다. 그러한 가죽부대에 새로운 포도
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부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뻣뻣하고 질기기만
하여 새로운 포도주를 부으면 터져버립니다. 아브라함이 그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
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
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이삭만
이 아브라함의 씨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죄에 대하여는 더 이상 근심치 말
라고 하시지만, 그 원칙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에 대하여 분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삭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기 때문입니
다.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더 먼저 태어났고, 이스마엘의 힘이 이삭 보다 더 세고,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더 키가 크고 아는 것이 많다 할찌라도 아브라함의 씨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의 방법으로 된 것 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하나님을 기다리
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21장 13절부터 19절 까지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삭에 대
하여 말씀하신 후에, 이스마엘에 대하여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13절에서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
니’라고 말씀하는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첩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씨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씨라는 의
미일까요? 이는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씨임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비록 하나님에 의하여 태어난 아들은
아니라 할찌라도 육신의 아들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하나님에 의하여 인정되는
아들은 아니라 할찌라도 아브라함의 씨임은 분명하기에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도 네 씨라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 그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을 위하여도 하나님께서 한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
님께서 이삭은 가장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지만,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을 위하여도 한 민족이 되
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약속의 자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큰 일을 하시지만, 육신의 아들 이스마
엘도 일정한 세력을 가지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로 인하여 괴로워 하였지만,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들
은 후, 그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떡과 물 한가죽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
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가게 하였습니다. 하갈이 나가 브엘세바에서 방황하였습
니다. 브엘세바에서 방황하던 중에, 물이 떨어졌습니다. 사막과 같은 황량한 땅에서 물이 없어질 때, 그
상황은 어떠하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서 얻은 물 한 가죽부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물 샘 곁
에 살 때를 비교해 보십시오? 어느 것이 사람에게 훨씬 좋을 까요? 물을 얻어먹는 것과 솟는 샘 곁에 사
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을까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바로 이 하갈의 처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
다. 물을 얻어먹기보다, 샘 곁에 사시기 바랍니다. 물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냅니다. 그 하나님
의 말씀을 떠가는 생활 보다 그 하나님의 샘 곁에 산다면 여러분의 심령이 그렇게 황폐하지는 않을 것입니
다. 마음이 메말라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샘 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
이 깨달아 갈 때, 마음이 부드러워지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말
씀으로 만족하고 있음을 시편 23편을 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 으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그의 간증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였습니다. 그 목자는 물과 풀
을 마음껏 뜯어먹게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족한 양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갈은 브
엘세바에서 물 샘을 발견치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음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브엘세바란 용의
의 뜻은 ‘ 일곱 우물, 혹은 언약의 우물’입니다. 일곱 우물 혹은 언약의 우물이라는 뜻을 지닌 장소에
서 하갈은 물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브엘세바란 단어가 우물을 타나낼 뿐만 아니라, 그 브엘세바에는 우물
들이 실제로 많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그 우물을 찾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구원받은 아브라함도 그러한 적이 잇었지만, 구원받지 못한 하갈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여종의 아들도 내가 곧
하나님께서 한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로 보면 물이 다 떨어져 죽을 것 같아
도, 하나님께서 육신의 아들도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이 하갈을 지배하지 못하였
습니다. 그 말씀이 그녀의 마음에 있지 아니하였음을 말씀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그 아
들 이스마엘을 떨기나무 아래에 두었습니다. 그 까닭은 아들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였
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그 떨기나무로부터 화살을 쏘았을 때 그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갔습니다. 그곳에
서 아들을 마주보았습니다. 차마 그 아들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그 어머니 하갈의 처절
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여기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의 말씀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상황이 어렵게 될 때,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지 못합니다. 그러
나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처음엔 그 말씀이 생각나지 않지만 조금 후엔 자신의 깨달은 말씀
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갈은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황량한 것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젠 죽음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고사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죽음도 임
박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서 아들을
보며 크게 고통스러워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퍼져 앉아서 울었습니다. 하갈은 16절에서 목소리를 높여 울었
다고 말씀합니다. 이 울음은 통곡입니다. 그녀는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
나셨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 하나님께서 하갈의 통곡을 듣고 하나님의 천사를 하갈에게 보내신 것이 아니
라, 그 아이 곧 이스마엘의 음성을 들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육신의 대
상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이스마엘 역시 이때 15세 내지 20세 정도였으니 물이 없다는 것을 왜 몰랐겠습
니까? 그 가운데 그는 그 참담한 상황에서 소리를 발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소리인지 아니면 신음소리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고통의 소리 곧 목말라 고통하
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 아이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하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
나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갈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를 흠정역성경에서는 ‘하갈아 무엇이 너를 괴롭게 하느냐?’라
고 말씀합니다. 하갈을 괴롭게 한 것은 물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구원받지 못한 하갈이라
도 돌아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구원받은 자뿐만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의 참담한 상황에서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인자한 분이십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우
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거절한다 할찌라도 그들의 처참한 상황에서 부르짖을 때 그들을 도우시는 분이심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듯 사람을 도울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왜냐하면 하나
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하갈에게 두려워 말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서 그 아들의 음성을 들으신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면 그 들으신 것을 이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그 소리를 아뢰는
것이 참 필요하다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리를 아뢰어도 급하지 아니할 때
는 속히 이행하지 아니하고, 그 상황이 급할 땐 하나님께서 속히 이행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갈에게 18
절에서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어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그때 하갈이 샘 곧 우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샘이 없는 것
을 하나님께서 샘을 만들어 보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샘이 있었어도 하갈이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
리가 절망 가운데 빠지면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각이란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로 하여금 샘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샘은 하갈 바로 근처에 있
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보지 못하던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심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의 말씀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샘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셔야만 그 말씀을 깨달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창세기 21장 19절부터 21절 까지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
을 열어 샘을 보게 하실 때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녀에게는 물이 필요하였습니다. 물이
그녀에겐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녀는 곧장 그 우물로 가
서 그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목말라 하던 사람에게 물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물을 고마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야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조금씩 깨
달아 갑니다만, 그 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들이 아닙니까? 사실 요즈음에야 물
을 돈 주고 삽니다만, 이전에는 그 물을 거저 마실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것도 물이 오염되고 나서부터
물을 우리가 사 마시곤 해 왔지 않습니까? 우리가 물을 마음껏 안심하고 마실 수 있었을 때, 우리는 그렇
게 물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갈과 이스마엘의 지금의 처지와 상황을 우리가 당하
였을 때, 그 물은 얼마나 고맙고 고마웠을까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은 누군가가 물 한 방울이라
도 자신의 입안에 넣어주기를 갈구합니다. 사람들이 목이 극히 마를 때, 그 상태를 목이 타 들어간다고 표
현합니다. 목이 물을 갈급해 타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태일 때, 그 물은 얼마나 사람으로 하여금 생기가 돌
게 합니까? 그 물은 몸의 목을 축이게 하고, 그 혀를 서늘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시
원케 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 필요한 것들은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이지
만, 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아는 것들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 곧 영을 위한 물을 여러분은
마시고 계십니까? 그 마음 곧 영은 사람들이 아는 것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그 마음 곧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채울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갈이 그 아들에게 물을 마시움으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구원받은 자는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이와 함께 하셨다
고 20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
님께서 그 아이와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아이 이스마엘은 자라 활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활쏘
는 사람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 새나 짐승을 잡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 직업은 사냥꾼이었습니
다. 그의 거처는 황량한 광야 곧 사막이었습니다. 그 광야는 바란 광야였습니다. 바란이라는 단어는 장식
품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그곳이 비록 광야이기는 하였지만, 여러 장식품들
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장식품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사냥으로 잡은 동물들이나 새
들로 이루어진 장식품들이 아닐까 합니다. 사냥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가축을 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
들은 날아다니거나 기어다는 것들을 잡아서 생활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직업을 가진 이스마엘을
위해 그 어머니 하갈은 아내를 구해 데려왔는데, 이스마엘의 아내 역시 이집트인이었습니다. 하갈이 이집
트여인이었듯이 그 며느리도 이집트인으로 데려왔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애굽 여인 하갈이 사라
를 수종들기를 십 여년, 그리고 아브라함의 첩으로 십 수 여년을 함께 하였지만, 그녀는 변화되지 않았습
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종교생활을 오래 하여도 변화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갈이 아브라함과 사라와 함께 거의 20년 이상이나 함께 살았지만, 그 생활이 여전하였음
을 그 며느리를 구하는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로는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는 한 변화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하나님
의 말씀을 깨닫지 않는 한 그 사람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깨닫지 않는 한
그 사람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복음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무엇보다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 요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왜 그 복음의 요체입니까? 예, 사람들은 그 죄 때문에 죄에 매
여 많은 죄들을 지으면서 고통을 당해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한번 음미해 보십시오! 예수의 이름의 뜻은 ‘저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들의 죄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이 땅에 어셔서 할 일이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오
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종교인 하갈과 같이 하나님이 부르신 아브라함과 함께 오랫동안 있었지만
구원받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한 가운데 교회생활을 하는 분은 없습니까? 하갈은 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
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거쳤지만 하갈은 그렇지
못함을 그 며느리를 선택하는데서 볼 수 있습니다. 이로 보면 그녀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아브라함과 함
께 살았던 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인은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아직도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시는 분은 없습니
까?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나, 혹은 금식을 하면서 자신의 죄로 고통스러워하는 분은 없습니까? 게다가 변
화가 없는 종교생활을 하시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발견하셔야만 합니다. 머리
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상령님으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분의 죄
와 죄들을 십자가로 가져 가셨습니다. 여러분의 죄들을 십자가에서 모두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
님께서 여러분들의 죄들을 기억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0장 17절에서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억지 않다는 것은 그 죄들을 그냥 두고 기억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해 가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죄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바로 그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냥 종교인으로 여전히 그 죄의 용서를 구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2000년전에 이미 당신의 죄를 사하
셨습니다. 당신의 죄들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 죄들이 어떻게 된 것을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
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왜 자신을 자꾸 쳐다보십니까? 자신을 자주 쳐다보는 것
이 양심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해 주
신 일을 바라보지 않는 한 여러분에게는 마음의 평화나 기쁨 그리고 더 나아가 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계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에서 더 이상 고민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예
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들이 십자가에서 다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거짓말하실 수 있습니까? 결
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죄로 인하여 괴로워 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은혜의 십자가입니다. 이미
모든 죄들을 용서받았는데 왜 괴로워 하십니까? 더 이상 하갈과 같은 종교인의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
다. 종교인은 자신의 힘으로 신에게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
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놓으신 것들을 왜 바라보시지 않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영혼
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이를 흠정역성경에서는 그것이 마쳐졌다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쳐지고 이루
었다는 말씀입니까? 예, 죄가 마쳐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하갈과 같이 두려움 가운데 종교인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하갈은 자기의 아들을 위해 며느리를 데려 오는 일에도 자신의 남편, 그리고 이스마엘의 아
버지인 아브라함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종교인은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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